1년이 지났고, 1년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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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근두근,
기대하지 않으려 해도 결과 발표를 열어보는 건 언제나 긴장되고, 기다려진다.
이번 학기는 나에게 어떤 시간이었을까.
지난 학기보다 더 나아졌다.
이게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위로인지, 다른 누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않아도 상관없을 정도로 나 자신에게만큼은 정말 큰 의미가 있다.
커리큘럼상 수강해야 하는 국제학 수업 International Relations (국제 관계), International Security (국제 안보) 두 개를 비롯해서, 이번 학기에는 한영/영한을 한 수업에서 다뤘던 번역 수업, 한영/영한 통역 수업 하나씩, 그리고 정제된 한국어 글쓰기 및 포스트에디팅을 배우는 고급한국어 수업까지 대부분의 수업에서 A+를 받았다.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결과도 만족스럽고, 교수님들의 피드백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1학기 때보다는 한 뼘이라도 성장했다는 느낌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물론 통번역대학원 공부에서 성적이 전부는 아니다. 앞선 1학기 마무리 글에서도 밝혔듯, 절대 평가로 이루어지는 통대 수업은 학생들의 학점 평균이 전반적으로 높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의 경쟁을 의식하는 것보다는, 나의 과거보다 (한 달 전, 한 학기 전) 나의 현재가 얼마나 더 발전했는지가 진정한 가치를 지닌다. 이 실질적인 '향상감'의 정도에 따라 통번역 공부와 적성에 대한 평가와 자기인식이 달라진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 향상감은 여간해서 잘 느껴지지 않는다는 게 마음을 어렵게 한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잘 느껴지지 않는 향상감은 기대하기 어렵고, 성적표가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더욱 정진할 계기를 삼는 얼마 안되는 자극제이자 요소가 된다. 성적을 조회하는 내 마음은 '별거 아냐' 하면서도 동시에 정말 많이 떨렸다. 더군다나 지난 첫 학기에 영한(BA) 통역에서 생각보다 아쉬운 점수를 받은 탓에 이번 학기는 수업 내내 잔뜩 긴장하고 애를 썼던 것 같다. 교수님은 다정하고 부드럽게 수업 지도를 해주셨지만 나는 트라우마처럼 박힌 생각 때문에 첫 시간부터 내 모든 통역 결과물이 평가되고 있음을 잊어버리면 안된다고 되새겼다. 솔직하게 고백하자면 일희 일비 하지 않아야 하는데, 내 마음은 대부분 비비비의 관성에 끌리곤 했었다. 기대보다 못한 내 자신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건 정말 너무너무 견디기 힘들다.
영어를 포함한 외국어 공부란 참 이상하다.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과 실제 할 수 있는 것의 갭은 생각보다 크다. 몇 단계나 수준이 높은 통역 공부는 더더욱 어렵게 느껴지고 그 경지가 어딘지 미스테리하다. 뇌가 간질간질하면서 이렇게 들은걸 저렇게 말해봐야지, 생각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은 잘 나오지 않고, 그런 어버버한 나를 목격하는 동시에 머리 속은 복잡해져서, 입이 다시 굳어져버리는 현상이 불쑥불쑥 일어난다. 어쩔 때는 총체적인 무력함 속에 나를 내던지면서 계속 다시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연습을 하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실제로 학우들끼리 자주 통번역 공부가 얼마나 자학적인 과정인지에 대해 논하곤 한다. ("이게 언젠가 되긴 하는거야?"). 결국 모든 이루어낼 일은 '믿음'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통번역 공부를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을 앞에서 실컷 쏟아놓았지만, 사실 1년 동안 공부를 하면서 이 일이 힘든 만큼 참 의미있다고 느꼈던 순간들도 있었다. 실제로 통역이라는 활동을 통해서 언어가 다른 두 주체 사이에서 누군가의 입이 되어주고, 그들이 전하고 싶은 무언가를 명쾌하게 전해주는 메신저가 된다는 것. 생각이 통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일. 명확한 필요에 의해 내 능력이 알차게 쓰임받는다는 것. 이 느낌은 이전까지 내가 흐릿하게 느낀 나의 어떤 가치보다도 더 선명하게 느껴지는 현실이었다. 비록 지금은 더 배우고, 혹독히 평가받고, 더 향상시켜야 할 여지가 많은 입장이지만, 그 노력 끝에 얻어질 결과물과 나라는 존재의 활용처는 생각보다 더 뿌듯하고 의미 있는 결과일지도 모르겠다는 기대감이 든다.
이 시점에서 새롭게 깨달은 게 있다면 통번역 일은 상당히 "서비스직"에 가깝다는 점이다. 이전까지 회사에서 일을 할 때는 내가 사람을 직접 마주하거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모든 것을 처리해야만 하는 환경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매개체가 있었던 것이다. 일 그 자체일 수도 있고, 회사가 판매하는 상품이 될 수도 있고, 다양한 범주의 매개체가 나라는 사람의 정체성을 적당 수준까지 가려주었다. 누군가를 위해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게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고 그에 상응하는 가치인 자본주의의 연료, 월급이라는 숫자로 수령했다.
그런데 통번역 일을 하려면 세상을 직접 마주하고, 사람을 만나야하고, 그들의 눈을 바라보아야 하고, 그들의 생각을 한발 먼저 이해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서비스해야하는 직업이었다. 지금까지 늘 스스로 방향성을 정해오며 살아왔었고,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고 생각한 적은 없던 사람인데, 결국 내가 찾아온 이 길은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기 위해 가장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는 과정이었다. 미처 생각지 못했던 포인트라 충격적이었다. 나 자신의 성취나 업적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헌신하고 기여하는 전문적 기술이라는 건 지금껏 생각하기 어려웠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또 한번 Big Question을 품게 된다. 나는 이 업의 특성을 완전히 내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다른 사람을 위한 서비스로서의 통번역은 내 적성에 잘 맞는 일일까? 내가 지금까지 열심히 공부하고, 살아온 것은 궁극적으로 무엇을 위한 일일까? 이런 질문을 던지다보니 단순히 통번역과 관련된 화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나와 일의 관계는 어떻게 만들어 나가야 하는걸까? 수많은 자기계발 서적을 읽어도 답은 몽롱했고, 수년간 회사 생활을 해도 아무도 귀띔해주지 않았던 내용이다.
봉사 활동이 아닌 이상, 기부나 적선이 아닌 이상, 벌어먹는 일이 되었을 때 나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기대하게 될 것이고, 그간 들인 노력과 시간, 땀과 피를 보상받고 싶을 것이다. 여느 직업과 같이 대가를 받는 만큼만 힘과 열성을 다 할 수도 있고, 그게 사실 큰 문제는 아닐 것이다. 이런 길을 택하지 않고 아무 변화 없이 살아가도 어쩌면 전혀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굳이 내가 문제라고 느껴져서 모든 걸 뒤집어 엎어본 것이니까. 처음부터 끝까지 대책 없는 나는 아직 답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조금 더 내가 겪어보고 느껴보고 나 자신을 실험해봐야 알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나에게 주어진 제한 시간 2년의 절반, 2024년이 지나 2025년이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