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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Yujin Kim Oct 02. 2023

너의 이름은

토요일 오후. 딸아이가 친구 집에 놀러 갔다 돌아왔다. 딸아이 친구는 내가 아침마다 산책을 다니는 공원 근처 콘도에 살고 있는데, 거기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산책을 하고 있던 강아지 투로를 만났다고 했다.

몇 달 전 딸아이와 주말에 산책을 함께 나갔다가 투로를 만난 적이 있어 딸아이도 투로의 얼굴을 알고 있었다. 

 

"엄마, 투로가 투로가 아니래."

"그게 무슨 말이야? 투로가 투로가 아니라니."

"투로의 이름은 츄로래. 내가 집에 오는 길에 투로를 만났거든. 그래서 "Hi, Turo"하고 인사를 했는데, 반려인아줌마가 우리 츄로를 어떻게 아냐고 물어보더라고. 그래서 우리 엄마가 산책할 때마다 투로를 만나서 얘기를 많이 들었고 같이 본 적도 있다고 했지. 그런데 이름이 츄로냐고 물어보니까. 츄로래. Churo."


나의 투로는 이름이 츄로였다. 처음 투로를 만났을 때 강아지 이름이 뭐냐고 물었더니 함께 있던 헬퍼 티카가 분명히 투로라고 했었다. 내가 츄로를 투로라고 잘못 알아들은 것인지, 그녀가 츄로를 투로라고 말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다. 분명한 건 투로는 자기를 엉뚱한 이름으로 부르는 한국 여자에게 지난 반년 간 기꺼이 꼬리를 흔들고, 배를 내어주었다는 사실이다. 


Churo


2009년 나의 첫아기가 태어났다. 아들이 태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부터 이름을 열심히 골랐다. 아이가 갖게 될 세 나라 국적에 걸맞게 세 나라에서 모두 같은 발음으로 불리는 이름을 선택하고 싶었다. 시어머니의 나라 프랑스, 남편의 나라 독일, 나의 나라 한국에서 똑같은 발음으로 불리는 이름 말이다. H는 프랑스어에서 묵음이어서 H로 시작되는 이름은 제외시켰다. Henry를 프랑스에서 앙리로 부른다. 독일에서 J는 Y처럼 발음되기 때문에 J도 제외시켰다. Julian을 독일에서는 율리안이라 부른다. 세상 쉬울 것 같은 내 이름 Yujin도 어떤 독일 사람들은 발음을 묻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유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한국 사람들은 F를 발음하지 못하고 자꾸 P로 발음하기 때문에 F도 제외시켰다. 이렇게 몇 가지 자음을 빼고, 세 나라에서 부르기 쉽고 예쁘기까지 한 이름으로 찾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유럽에서는 아이의 이름을 고를 때 전통이 있는 오래된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았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이름이 있지만 내 아들이 태어나던 때에도 여전히 선호되는 오래된 이름들이 있었다. 남자아이의 경우 막시밀리안, 테오도르, 요한, 여자아이의 경우 샬롯테, 헬레나, 엠마 같은 이름이 시대를 넘나들며 사랑받는 이름이었다.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오래된 이름을 주고 싶지 않아 최대한 시대에 걸맞는 예쁜 이름을 지어주려고 열심히 찾았다. 유럽에서 첫 번째 이름은 부모가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지만 중간 이름은 조부모나 증조부모 이름을 따오는 경우가 많았다. 시누이의 중간이름은 친할머니 이름인 Magdalena(막달레나)였다. 중간 이름이라 괜찮다고 하기엔 많은 아이들이 시대에 맞지 않는 중간이름으로 창피해하는 경우가 많았다. 나의 시누이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나 역시 내 아이들에게 그런 만행을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아름답지 않은 전통은 끊어내는 게 마땅했다. 


얼마전 만난 아들 친구의 부모를 만나 저녁을 먹으며 이름에 대한 대화를 한 적이 있다. 부인 이름이 Gertrud(게아투르드)였는데 오래된 이름이라 애칭인 Gertie(게아티)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한다고 했다. 


"Gertrud는 그래봬도 독일에서 '1905년에 가장 사랑 받았던 이름(Die beliebsten Vornamen des Jahres 1905)'으로 선정된 이름이야. 다만 그 이후에 다시는 사랑받는 이름으로 선정된 적이 없지만."

그렇게 얘기하며 Gertie의 남편이 막 웃는 바람에 나도 함께 즐겁게 웃었던 기억이 있다.    


남편과 나는 세 나라에서 똑같이 발음이 되는 알파벳 L을 선택했고, 결국 아들의 이름은 최종 Liam이, 딸의 이름은 Luna가 되었다. 이렇게 신경을 써서 지은 이름이지만 어떤 사람은 리암을 라이암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전 세계 공통으로 불리는 이름을 찾는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리암이 두 살 정도 되었을 때, 루나가 아직 태어나기 전, 독일 바인하임이라는 곳에 살던 때였다. 우연히 놀이터에서 알게 된 중국 엄마가 있었다. 당시에 내 독일어 실력도 유창하지 않았는데 중국 엄마의 독일어는 내 독일어보다 더 알아듣기 어려운 수준이었고, 발음도 일반적이지는 않았다. 그녀에게는 리암보다 한 살 많은 아들이 있었는데, 그 아이의 이름은 데비데라고 했다. 아시아인이 별로 없던 동네라 그런지, 둘 다 독일 남편을 두어서 그런지 의사소통이 쉽지는 않았지만 놀이터에서 만나면 반갑게 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그러던 어느 날 중국 엄마가 우리를 집으로 초대했다. 의사소통이 부담이 되었지만 거절할 이유 역시 급히 찾지 못해 그 집으로 가게 되었다. 아이들은 두 살, 세 살 정도라 별다른 대화 없이, 데비데 방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기도 하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아이들이 그려 놓은 그림은 동그라미, 선이 혼합된 아주 간결한 그림이었다. 누가 어떤 것을 그린 것인지 친엄마도 구분할 수가 없어 아이들에게 물어보고 이름을 써 놓기로 했다. 아무리 누구나 그릴 수 있는 간단한 그림이라도 그 나이 때는 아주 소중한 작품이기 때문에 집에 갈 때 챙겨가기 위해서였다. 그때 난 데비데가 데비데가 아니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금까지 불러왔던 데비데는 사실 David였다. 독일에서는 다비드라 부르고 영어권에서는 데이비드라 부르는 그 David. 


깜짝 놀라 내가 중국 엄마에게 얘기했다. 

"난 네 아들 이름이 지금까지 데비데인줄 알았는데 다비드네." 

"어 맞아. 데비데." 

중국 엄마는 내가 다비드라고 발음해도 데비데라고 듣는 것 같았다. 분명 그 아이의 이름은 David였지만 그녀에게는 데비데였던 것이었다. 츄로를 투로로 잘못 불러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때의 데비데가 생각났다. 그 아이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을까? 


아무리 신경을 써도 결국 각 나라에서 다양하게 불리는 게 이름인데, 중국 엄마에게 다비드는 그녀가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데비데이고, 나에게 츄로는 털복숭이 귀여운 투로일 뿐이다. 




거실 한쪽에서 루나와 리암이 키득거리고 있었다. 투로와 츄로 이름 에피소드를 얘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마도 티카가 투로라고 얘기했을 가능성보다 엄마인 내가 투로라고 잘못 알아들었을 가능성에 더 힘을 싣고 있는 것 같았다. 영어 발음이나 독일어 발음 때문에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할 때가 종종 있었다. 제대로 안 듣고 대충 들어 두었다가 다시 말할 때 꼭 10%씩 이상하게 말하는 경우가 다반사였고, 독일어의 R로 시작하는 단어나 Wood, Quote는 아무리 노력하며 발음해도 아이들이 배꼽잡고 웃는 단어들 중에 하나다. 


"떽! 

니들 그거 알아? 이 엄마가 전통을 너희 인권 앞에 뒀다면 니들은 리암 성덕, 루나 명자가 될 수도 있었어! 

엄마한테 고마운 줄 알아!" 


Churo와 그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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