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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제숙 Sep 01. 2020

고구마 캐기

2020.9.1.화

남편이 은퇴를 하면 등을 누일 조그마한 집을 지으려고 사둔 시골집 마당에 지난 봄 고구마를 심었다.

어젯 밤 남편이 내일은 가서 고구마 한 이랑만 수확을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오늘 아침엔 두 이랑이라고 다.

'정직'에 방점을 찍어두고 거의 그렇게 살아온 남편이지만 밭에 나를 데리고 일을 하러 갈 때는 슬쩍 말을 바꾸기도 한다. 간단하게, 조금만, 가볍게, 한 이랑만, 풀만 뽑을 거야, 물만 주면 돼.

거기에 혹해서 생각없이 따라나섰다가 화가 뻗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조금만이 제법 많이가 되고, 풀만 뽑고가 물 주기까지 내처 해버리는 탓이다.


 만지는 일에 별 관심도, 재주도 없는 나는 근처에도 얼쩡거리지 않는다. 하지만 고구마는 내가 더 좋아하는데 캐는 일까지 혼자 하라고 할 수가 없어서 두 이랑으로 합의를 보고 따라나섰다. 모두 다섯 이랑인데 다음 주에 두 이랑을 마저 하고 한 이랑은 추석 때 며느리가 체험학습을 하겠대서 남겨둘 참이다.



역시 나는 책 읽기가 가장 쉬운 모양이다. 독서모임을 이끌고 있는 나는 책을 읽다보면 이 책으로 할 토론거리가 보였다. 중요한 문장이나 작가가 하고 싶은 말들이 쉽게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농사는 아니었다. 줄기를 걷어내면 고구마가 줄줄 딸려나와 호미로 캐기만 하면 되는 줄 알았더니 웬걸, 물을 자주 먹지 못한 고구마는  살아남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던지 땅속 깊이 몸을 곳곳하게 세우고 박혀있었다.

아무리 파도 고구마는 꿈쩍도 안했다. 어느 순간 고구마를 캐는 것이 아니라 고구마를 붙들고 사정을 하고 있었다.

사람 사는 일이나 식물들이 사는 일이나 그저 가볍고 쉽기만 한 일은 아닐 듯 하다. 오늘 고구마를 캐면서 얻은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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