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은 잠들지 않는다 1

by 킥더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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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은 얼마 전 결혼한 고등학교 친구 종수 신혼집에 초대를 받아서 왔다. 종수 부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종수가 요리를 좋아한 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직접 요리한 음식은 오늘 처음 먹어 봤다. 예상보다 훨씬 맛있어서 놀랐다. 종수와 친하고 안지도 오래 됐지만 이 정도로 요리를 잘하는 줄은 몰랐다. 요셉은 종수 부부가 저녁 먹은 걸 정리하는 동안 집안을 둘러보고 있다. 집이 꽤 넓고 좋다. 인테리어를 새로 다해서 새집이나 다름없어 보인다. 요셉은 결혼하자마자 이런 좋은 집에 사는 종수가 부럽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서재로 들어왔다. 한 쪽 벽면 전체가 책으로 채워져 있다. 요셉은 책장에 어떤 책이 있는지 천천히 살펴본다. 종수가 책을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대부분 종수 아내의 책임이 분명하다. 종수의 아내, 세아는 미대를 나와 대기업에서 제품 디자이너로 일한다고 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책장에 미술관련 책이 많다. 요셉은 아무 책 한 권을 책장에서 뺐다. 표지에 서양 미술사라고 적혀있고 책이 꽤 두껍고 보기보다 훨씬 무겁다. 몇 장 넘겨 보니 글은 얼마 없고 그림으로 가득하다. 요셉은 책을 빠르게 넘기다 무작위로 한 페이지를 펼쳤다. 펼쳐진 페이지의 그림에는 아주 먼 옛날 사람으로 보이는 남자 4명이 있다. 세 명의 남자가 한 남자의 몸에 난 상처를 신기하듯 쳐다본다. 그림 밑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카라바조, 의심하는 도마 1601-1602, 포츠담 신궁전>이라고 적혀 있다.
“의심하는 도마, 카라바조.” 요셉이 아주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 그림을 한 참을 뚫어져라 본 후 엄지손가락으로 책 전체를 다시 빠르게 넘겨가며 본다. 요셉은 책을 끝까지 훑어보고 원래 자리에 다시 꽂았다. 이때 종수가 요셉을 부른다.
“요셉아! 거실로 와.” 요셉은 종수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듣고 계속해서 책장에 꽂힌 책들을 천천히 본다.
대답이 없자 종수가 다시 부른다. “정요셉! 뭐해? 얼른 나와.”
그제서야 요셉은 종수가 부르는 소리를 듣고 거실로 나왔다. 저녁 먹었던 테이블은 깔끔하게 정리가 돼있고 대신 와인과 와인 잔이 보기 좋게 놓여 있다. 종수는 보울이 넓고 깊은 잔에 레드 와인을 따르고 있다. 와인 따르는 소리가 거실 전체에 퍼진다. 세아는 와인과 함께 먹을 몇 가지 안주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이상하게 종수의 아내가 저녁 먹을 때와 어딘가 다르게 보인다. 잠깐 사이에 더 아름다워졌다.
종수는 서재에서 나오는 요셉을 보고 말한다. “앉아. 한 잔 해야지.”
최대 8명 정도 앉을 수 있는 긴 테이블이 밖을 내다 볼 수 있는 거실의 큰 전면 유리 옆에 놓여있다. 유리창 밖으로 우면산이 보인다. 27층에 위치한 종수 집은 우면산과 우면산 바로 앞 예술의 전당이 한 눈에 들어오는 전망을 가지고 있다. 막 해가 지기 시작한다. 떨어지는 해는 푸른 하늘을 빠르게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하늘의 변화는 어느새 우면산도, 예술의 전당도, 지금 앉아있는 테이블도, 종수와 세아의 얼굴도 분홍빛으로 물들였다. 마치 분홍색 공기가 주위를 가득 채우고 있는 느낌이다.
“와! 오늘 분위기 너무 좋다. 세상이 완전 핑크 핑크 하네. 이런 느낌이 자주 나면 좋을 텐데. 그리고 이런 순간이 오래 지속되면 좋을 텐데 말이지. 아쉽게도 해가 떨어지면서 너무 빨리 사라진다니까.” 세아가 아쉬움이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세아의 말대로 핑크 빛 세상은 잠시 후 사라졌다. 요셉이 자리에 앉으면서 말한다. “그러게요. 전망이 너무 좋아요. 특히 해지는 풍경이 정말 예술이네요. 그나저나 세아씨는 책 읽는 거 좋아하나 봐요? 서재에 갔더니 책장에 책이 엄청 많네요. 분명 종수 책은 아닐 텐데 말이죠.”
와인을 다 따르고 건배를 제안하면서 종수가 말한다. “당연히 내 책 아니지. 나는 고등학교, 대학교 때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지금은 책 읽는 거 별로 안 좋아해. 일에 필요한 논문이나 전문 서적 보는 거 말고는 거의 안 봐.”
“사실 저도 요새 책 잘 안 봐요. 대부분 오래 전에 산 거에요. 예전에는 항상 자기 전에 책을 봤는데 요즘은 잘 안보게 되더라고요.”
요셉이 세아의 말에 맞장구를 친다. “저도 그렇거든요. 예전에는 자기 전에 항상 책을 봤는데, 요즘은 스마트폰을 하게 되더라고요.”
“그쵸? 저랑 똑같네요. 저도 자기 전에 항상 스마트폰을 해요. 그런데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을까요?”
“저는 불면증이 있어서 잘 때 스마트폰을 더 보게 되는 거 같아요. 자려고 누웠는데 잠 안 오면 스마트폰 보고, 다시 자려고 하다가 잠 안 오면 또 스마트폰 보고 그래요. 그렇다 보니까 잠을 깊이 못 자서 아침에 일어나도 개운하지가 않아요.”
“요셉아, 그렇게 잠을 잘 못 자?” 종수가 물었다.
“응. 잠을 잘 못 자는 편이야. 잠 들었다가도 중간에 깨서 다시 잠이 안 올 때도 많아.”
“정말? 그 정도면 꽤 심한 불면증 같은데. 네가 불면증이 그렇게 심한 줄 몰랐네. 나는 베개에 머리만 대면 잠들거든. 대신 나는 자다가 화장실을 자주 가. 화장실 때문에 자주 깨는 편이야.”
“요셉씨 힘들겠다. 제가 그 마음 잘 알아요. 저도 불면증 심했거든요. 잠 안 오면 정말 괴롭잖아요. 그런데 저는 남편이랑 연애하면서부터 불면증이 많이 좋아졌어요.”
“정말이요? 연애하니까 불면증이 바로 없어진 거에요?” 요셉이 물었다.
“아니요. 바로 없어지지는 않았고요. 6개월 이상 만나고 나서부터 조금씩 없어진 거 같아요.” 세아가 종수를 보며 말한다. “그런데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결혼하고 나서 가끔 잠이 안 와서 힘들 때가 있는데. 그럼 자기 만나서 불면증이 없어진 게 아닐 수도 있겠다.”
“무슨 소리야? 나 만나고 안정감이 드니까 불면증이 사라진 거지.” 종수가 강하게 말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닌데 결혼하고 나서 다시 잠이 안 올 때가 있다니까?”
“그건 스트레스 때문에 그렇겠지. 요즘 회사에서 스트레스 많이 받잖아.”
“뭐.. 그렇다고 치자.” 세아가 요셉을 보며 말한다. “요셉씨도 연애하면 불면증이 없어질 수도 있을 텐데. 몇 달 전에 소개해준 내 친구랑은 왜 연락 안 해요? 지영이는 요셉씨 마음에 들어 했거든요.”
요셉이 와인 잔을 비우며 말한다. “저랑은 잘 안 맞는 거 같아서요. 저한테 과분한 분이기도 하고요.” 종수와 세아도 요셉을 따라 와인 잔을 비웠다.
종수가 빈 잔에 와인을 따르며 말한다. “야! 한 번 보고 잘 맞는지 안 맞는지 어떻게 알아? 지영씨는 너 마음에 들어 했다니까. 안 맞는다느니, 과분하다느니, 이런 말도 안 되는 개소리 하지 말고 지금이라도 연락해 봐. 한 번 만나 보라고. 몇 번 만나다 보면 지영씨만의 매력이 보일 수 있어.”
“억지로 그러지마.” 세아가 종수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났는데 지영씨한테 다시 연락하기는 좀 그렇지.. 나도 인연을 빨리 만났으면 좋겠어. 두 사람 보니까 더 그런 생각이 들어.”
“사실 우리는 너무 이른 나이에 결혼했어. 요즘에 누가 스물아홉에 결혼해. 삼십대 초반도 빠르다고 하는데.” 세아가 말했다.
“맞아. 그렇기는 해.” 종수도 세아 말에 동의한다.
“아 맞다. 요셉씨, 점 보러 가는 거 어때요? 제가 잘 아는 집이 있거든요. 완전 잘 봐요. 저랑 같이 가서 연애운 한 번 물어 봐요.”
요셉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한다. “점이요? 저는 그런 거 안 믿어서요.”
“세아야, 다른 사람한테 권하지는 말라니까. 세아가 점 보는 걸 워낙 좋아해. 하하. 그리고 요셉이 집은 교회 다녀.”
“부모님이랑 누나는 다니는데 저는 교회 안 다녀요. 어릴 때는 다녔었는데 지금은 안 다녀요.”
세아가 종수를 보며 말한다. “그냥 재미로 보는 건데 뭐 어때? 교회 다니는 거랑 전혀 상관 없어. 내가 권해서 본 애들은 다 재미있어 했단 말이야. 더군다나 요셉씨는 교회도 안 다닌다고 하잖아.”
“하하. 그럼요. 당연히 재미로 볼 수 있죠. 사실은 얼마 전에 점 봤어요.” 요셉은 세아의 발끈하는 모습을 보고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 아까 안 믿는다며?”
“응 안 믿어. 내가 본 게 아니라. 누나가 점 보러 갔다가 내 것도 봤다고 하더라고.”
세아가 종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말한다. “거봐. 요셉씨 누나도 보잖아. 그냥 재미로 보는 거라니까. 뭐라고 했대요? 좋은 사람 만난대요?”
“누나 말로는 사주도 보고 신점도 보는 유명한 집이래.”
요셉의 말에 세아는 더 큰 관심을 갖는다. “오! 그렇구나. 그 집 저도 좀 알려주세요. 점괘가 어떻게 나왔어요?”
“저는 안 믿는데 누나한테 들은 대로만 얘기할게요. 관운이 좋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관운이 많다면서 혹시 동생이 공무원이냐고 묻더라는 거에요. 그래서 누나가 아니라고 했더니, 그럼 법조계에서 일하냐고 물었대요. 그것도 아니라고 했더니 점 보는 사람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그럼 어떤 일을 하냐고 물었다는 거에요. 그래서 동생은 대기업에 다녀서 관운이랑은 거리가 먼 거 같다고 누나가 말했나 보더라고요. 그랬더니 그 점 보는 사람이 그럴 줄 알았다면서 요즘은 대기업에 들어가는 게 워낙 어려워서 대기업 입사도 관운이 좋다고 본다고 말했다지 뭐에요. 저는 이 대목을 듣고 정말 어이가 없었어요. 어쨌든 점쟁이가 하는 말이 앞으로 회사에서 크게 성장하고 승승장구 할 거라고 했나 보더라고요. 그 이유는 관운이 좋아서. 요즘 세상에는 관운이 좋은 사람이 대기업에 들어가면 더 좋다고 그러면서, 공직에 있는 거보다 훨씬 더 잘 된 거라 그랬대요. 세상이 바뀌면 해석하는 관점도 달라져야 하는데, 자기니까 이렇게 볼 수 있지 아무나 이렇게 못 본다는 말까지 했대요. 제가 보기에는 무언가 억지로 끼워 맞춘 거 같은데 우리 누나는 잘 맞춘다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점술에 조예가 깊은 세아씨가 보기에는 어때요? 확실히 억지스럽죠?”
세아가 와인 한 모금을 마시며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아니요. 제가 볼 때는 완전히 잘 맞는 거 같아요. 세상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직업이 있고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도 많은데 대기업 다니면 당연히 관운이 있는 거죠. 요셉씨가 장사를 하거나, 사업을 하거나, 의사였으면 틀렸다고 할 수 있겠죠. 대기업에 다니는 건 관운이 완전히 좋은 거죠. 저는 그 집 진짜 용한 거 같은데요. 누님한테 어딘지 좀 물어봐 주세요.”
“그래요? 저는 좀 억지스럽다고 느껴졌어요.”
“또 뭐라 그랬대요?”
“인생 전반적으로 큰 굴곡이 없는 좋은 운을 타고 났대요. 사업은 하면 안 된다고 하더라고요.”
“굴곡이 없다니.. 요셉씨 사주가 아주 좋네요. 연애운이나 결혼운은 뭐래요?” 세아가 매우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는 믿지는 않지만 올해 운명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고 그랬나 봐요. 빠르면 한두 달 안으로 만날 수도 있다고. 하하.”
세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요셉을 쳐다본다. “한두 달 안에 운명의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고요? 그렇게까지 얘기해주는 사람은 처음 봐요. 진짜 용한 사람인가 보네. 요셉씨! 왠지 느낌에 곧 운명을 만날 거 같아요.”
“그러게 정말 누구 만나게 되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좋겠다. 야, 그냥 믿어 봐. 좋은 얘기인데 안 믿을 이유가 없잖아.” 종수가 요셉의 어깨를 살짝 치면서 말했다.
“아유, 말도 안 되지. 내가 한두 달 안에 운명의 사람을 만난다고 한들 나는 점 본거랑은 아무 상관 없다고 생각해. 점쟁이가 예지력이 있는 게 아니라 그냥 우연히 맞았을 뿐인 거지.”
세아가 발끈한다. “아니, 만났으면 맞춘 거죠. 왜 상관이 없어요? 당연히 예지력이 있다고 봐야죠.”
“그러게 만났으면 상관 있는 거지. 그런걸 어떻게 알고 맞추겠어?”
요셉은 답답한 표정을 짓는다. “세상에는 비슷한 사건들이 무수히 반복해서 일어나는데 아무라도 막 예측을 해대면 한 두 개는 얻어 걸린다고 생각 안 해? 그리고 내 나이가 누굴 만날 수도 있는 나이라 맞춘다고 해도 신기해 할 거 전혀 없다고 봐. 세상에 무수히 많은 만남 속에서 그냥 하나 얻어 걸린 거라고. 사람들은 틀린 건 쉽게 잊어버리고 맞춘 건 잘 기억하기 때문에 잘 맞춘다고 착각할 뿐이야. 더군다나 논리적으로 아무 근거도 없는데 어떻게 믿어?
세아는 요셉의 말을 받아 들일 수 없다. “왜 근거가 없어요? 사주가 됐든 신점이 됐든 다 나름의 논리가 있다고요. 이 세상에 다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라고요.”
“하여간 까다롭기는.. 그 정도 맞추면 인정해야지. 뭐가 그렇게 의심이 많아? 넌 세상 아무것도 안 믿는 거야? 세아 말대로 세상에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야. 완전히 틀리면 누가 보러 가겠어?”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그런 걸 믿어. 과학이 논리적으로 이 세상에 대해서 많을 걸 설명하고 있잖아. 아직 모르는 분야가 어마어마하게 많지만 계속 새로운 진실을 찾고 있다고. 아주 아주 오래 전에 만들어진 운명론을 어떻게 믿는다는 거야? ”
“누가 이공계 아니랄까 봐. 나도 이과지만 넌 융통성이 너무 없어. 세상을 좀 너그럽게 바라봐. 나는 인간에게 주술적 능력이 있다는 믿음이 세상에 반드시 필요하다고 봐. 필요를 넘어서 반드시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고. 종교도 다 필요하니까 존재하는 거고. 그걸 너무 과학적으로 따지고 드는 게 웃긴 거야. 정말 한두 달 안에 누굴 만나서 결혼까지 한다면 점쟁이 말을 포용해 줄 수 있는 거잖아. 하여간 쟤는 어릴 때부터 인정머리가 없었다니까.” 종수는 말이 끝나자마자 잔에 남은 와인을 비웠고 안주를 입에 넣었다.
“음.. 나는 그래도 아니라고 생각해. 우리 엄마도 내가 곧 누군가를 만날 거라고 말해. 난 그것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어머! 어머니도 믿으시는구나. 거 봐요.” 세아가 반가운 듯 말했다.
“그게 아니고요. 엄마가 요새 저 좋은 사람 만나라고 새벽 기도를 하시거든요.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에요.”
“야! 어머니께서 아들 잘 되라고 새벽에 기도하시는데 너도 좀 믿어라. 그걸 과학이 어쩌고 저쩌고 할 문제는 아니지.
“그렇기는 한데 아닌 건 아니지.” 요셉이 단호하게 말했다.
세아를 보며 종수가 말한다. “얘랑은 대화가 안 된다. 늦었다. 우리 남은 와인 마시고 마무리 하자.”
“나는 요셉씨가 곧 운명의 누군가를 진짜로 만날 거 같아.” 세아가 말했다.
“만나도 그건 우연이라니까요.”
“요셉씨 그렇게 안 봤는데 고집 장난 아니네요. 하하.”
“와! 정말 이 자식 징하다 징해. 내가 졌다. 자자, 마지막 잔 짠하고 끝내자. 요셉아 자주 놀러 와.”
“그래요 자주 놀러 와요. 요셉씨랑 이런 얘기하는 거 답답하기도 하지만 은근히 재미도 있네요. 하하.”
“세아씨, 저도 완전 답답했거든요! 하하. 농담이에요. 저도 재미있었어요. 종수야, 잘 먹고 잘 놀다 간다.”

한 달 후. 요셉은 협력업체 사무실에서 회의를 하고 있다. 회의실에 요셉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협력업체의 팀장과 직원 셋이 있다. 요셉은 개발 중인 장비 테스트 결과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말하고 있다.
“팀장님 말씀대로 빛의 난반사가 심해서 결과값이 잘 안 나올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하나의 광원으로만 테스트 하지 마시고요. 할로겐, LED, 레이저. 다양하게 실험해 주세요. 음.. 이미지 센서는 아무래도 CMOS에서 CCD로 바꿔서 테스트해 보죠. 지금은 비용 절감보다 민감도를 높이는 게 더 중요합니다. 각 부품의 성능만 가지고 결과값을 예측해서는 안됩니다. 한두 번 만족할 만한 결과 값이 나왔다고 만족해서도 안 되고요. 반복해서 테스트하고 계속 수정, 보완을 해야만 재현성을 확보할 수 있습니다. 그건 다들 잘 아시잖아요? 결과를 끊임 없이 의심하고 반복해서 실험해야만 장비의 성능과 효율을 높일 수가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이 점 꼭 기억해 주세요. 그리고 로보틱 모듈 담당하시는 분이 누구시죠?”
“접니다.” 가장 끝에 앉아 있던 협력업체 직원이 대답했다.
요셉은 대답한 사람을 보면서 다시 말을 이어간다. “쉽지는 않겠지만 공간을 좀 더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고민해 주세요. 지금 설계대로라면 장비가 너무 커집니다. 이렇게 해서는 시장에서 경쟁력이 전혀 없어요. 컴팩트한 디자인이 나 올 수 있도록 설계 단계에서부터 신경을 써야만 합니다. 기구 부피나 구동하는 공간을 감안하면 줄이는 게 쉽지 않겠지만, 머리를 짜내면 방법이 있을 겁니다. 부탁 드릴게요. 그럼 오늘 회의는 이쯤에서 끝내도 될 거 같은데요. 혹시 다른 의견이나 하실 말씀 있으신가요?”
다들 아무도 대답이 없고 표정도 좋지 않다.
“오늘 회의는 제 의견만 너무 일방적으로 말한 거 같아서 죄송한데요. 지금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으니 이해해 주세요. 팀장님, 제가 어려운 부탁 드린 거 알고 있습니다.”
협력업체 팀장이 손사래를 치면서 말한다. “아니에요. 저희는 연구원님께서 이렇게 명확하게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일하기가 편합니다. 방향성이 확실하니까 불필요한 일을 최소화할 수 있잖아요. 저희야 당연히 연구원님 입장을 이해하고 있죠.”
“서로가 처음 해보는 프로젝트라 시행착오를 겪을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저도 확신은 없습니다. 누구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 반복해서 테스트를 해야만 한다고 생각해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오늘 회의록은 작성되는 대로 보내주시고요. 다음 미팅은 2주 후에 하도록 할게요. 시료는 바로 준비해서 내일까지 보내드리도록 할 테니 일정 지연되지 않게 최대한 신경써 주세요. 다음 번에는 오늘보다 결과가 더 좋았으면 좋겠네요. 혹시라도 시간이 더 필요하면 미리 알려주시고요. 그래야 저도 일정 조정해서 회의 시간 다시 잡을 수 있으니까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요셉과 협력업체 직원들은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회의를 마쳤다.
요셉은 협력업체 사무실에서 나와 테헤란로를 걷고 있다. 협력업체 사무실은 요셉이 다니는 회사와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다. 협력업체 팀장이 팀원들과 함께 회사로 오겠다는 걸 요셉은 잠시 걸으면서 바람도 쐴 겸 자신이 방문하겠다고 했다. 요셉은 장비 개발을 외부에 위탁하지 말고 사내에서 직접 개발하자고 의견을 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협력업체 직원들이 일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마 지금 내 욕하고 있겠지? 팀장은 나보다 10살은 많아 보이던데. 어린 놈이 가르치려 든다, 개발하고 테스트 하는 걸 너무 쉽게 생각한다, 저 놈은 주둥아리로 개발하려 든다, 알지도 못하면서 이래라 저래라 한다, 너무 한 거 아니냐, 완전히 갑질이다. 별의별 욕을 다하고 있을 거다. 욕 먹어도 어쩔 수 없다. 일하는 태도나 아웃풋으로 보아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아무 결과도 못 얻을 것이 뻔하다. 철저하게 확인하지 않고 믿고 맡기면 대충 할 게 분명하다. 더 확인하고 더 강하게 밀어붙여야지. 내가 이럴 줄 알고 사내에서 개발을 하자고 한 거였는데. 다들 편하게만 일하려고 한다니까. 분명 후회할 거야.’
요셉은 협력업체와 했던 미팅에 대해서 계속 생각하면서 회사로 걸어가고 있다. 지금 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행이 되지 않고, 잘못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휩싸여 있다. 계속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다 왜 이렇게까지 신경을 쓰고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적당히 해도 되는데 말이다. 더 열심히 한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니다. 더군다나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지도 알 수 없다. 아무리 크고 좋은 회사라고 직원들의 인생까지 책임져 주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회사는 직원들에게 책임감을 강조한다. 아니 강요한다. 열심히 하지 않아서 프로젝트가 잘못 된다면 모든 책임은 요셉 자신의 몫으로 고스란히 돌아올게 뻔하다. 갑자기 머리가 아프다. 왼쪽 머리 안 쪽을 바늘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든다. 점점 더 심해진다. 통증이 너무 심해 저절로 왼쪽 눈살이 찌푸려진다. 더 심해지기 전에 진통제를 먹는 게 나을 듯 하다. 요셉은 주위에 약국이 있는지 둘러본다. 한 5미터 앞에 약국이 있다. 반가운 마음에 약국을 향해 빠르게 걷는다. 약국 입구에 거의 도착했을 때 머리 위로 가벼운 물체 하나가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물체는 머리를 맞고 요셉의 신발 앞에 떨어졌다. 요셉은 허리를 숙여 그 물체를 집었다. 스마트폰 하단에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는 스마트폰 펜이다. 요셉은 펜을 들고 하늘을 올려다 본다. 하늘은 파랗고 하얀색 작은 구름 하나가 떠 있다.
‘뭐야? 저 구름에서 이 펜이 떨어졌을 리는 없을 거고? 이 건물에서 누가 떨어뜨렸나?’’
가까이 있는 건물을 올려다 본다. 이 펜을 떨어뜨려 건물 아래를 내려다 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주위 건물을 둘러본다.
‘뭐지? 이 펜이 어디서 떨어진 거지? 신기하네.’
요셉은 얼마 전 스마트폰에 장착되어 있는 펜을 잃어버렸다. 지금 머리 위로 떨어진 펜은 요셉이 잃어버린 것과 같은 기종이다. 동일한 브랜드의 동일한 모델이며 심지어 색깔도 잃어버린 펜과 똑같다.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하단에 주운 펜을 끼워 밀어 넣었다. 펜은 “딸깍” 소리를 내며 스마트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단 말인가? 너무 신기하다. 요셉은 주위를 둘러본다. 이 펜을 잃어버려 찾고 있는 사람은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펜을 살지 전화기를 바꿀 때까지 그냥 쓸지 고민하던 차였다. 펜이 없어 메모를 손으로 하려니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는데 잘 된 일이다. 요셉은 다시 회사 방향으로 걸어간다.
‘얼마 전 잃어버린 펜과 똑같은 펜이 하늘에서 떨어지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신기하네. 물론 하늘에서 떨어진 게 아니라 누군가 근처 건물에서 떨어뜨렸겠지만.. 확률적으로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이런 게 운명인가?’
요셉은 멈추어 서서 뒤돌아 펜이 떨어진 장소를 봤다. 저 멀리 약국이 눈에 들어온다. 그제서야 머리가 아파서 약국에 가려고 했던 것이 생각났다. 지금 보니까 두통이 말끔히 사라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분명 머리가 심하게 아파서 급하게 약국으로 가고 있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통증이 없다. 스마트폰 펜이 머리 위로 떨어지고 두통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두통이 있었다는 사실 조차 까맣게 잊어버렸다. 마치 귀신에 홀린 기분이다. 회의를 하고 무거웠던 마음도 한결 가벼워 졌다. 요셉은 회사로 돌아가서 기분 좋게 일하다가 퇴근했다. 그날 밤은 평소와 달리 불면증도 없이 숙면을 취했다.

2주 후. 요셉은 사무에서 일하고 있다. 오전에는 협력업체 미팅을 다녀왔다. 2주 전에 그렇게 제대로 하라고 신신당부를 했는데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두 달 후면 장비 1차 시연을 해야 하는데 차질 없이 할 수 있을 지 걱정이다. 격주에 한 번 하던 회의를 시연 전까지 매주 하자고 했다. 그래도 불안하다.
‘또 내 욕하고 있겠지? 안 봐도 뻔하다. 지들이 똑바로 하지 못 한 건 생각도 못하고 남 탓만 하고 있을 거야. 내가 얘기한 거 반만 했어도 이렇게까지 열 받고 짜증나지 않을 텐데 말이지.’ 이때 스마트폰에서 벨이 울린다. 종수에게서 온 전화다.
“종수야!”
“요셉아, 통화 괜찮아?”
“그럼, 괜찮지. 이 시간에 왠 일이야?”
“너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목소리? 아무 일도 없어. 사무실에서 크게 얘기하기가 좀 그래서 그래.”
“그렇구나. 너 잠깐 시간 돼? 나 미팅 때문에 너희 회사 근처에 왔거든. 지금 막 미팅 마쳤는데 괜찮으면 잠시 차라도 한 잔 어때?”
“그래? 지금 별로 안 바빠서 괜찮아. 차 한 잔 하자.”
“잘 됐다. 나는 한 5분 정도면 너희 회사 쪽으로 갈 수 있을 것 같아. 5분 후에 전에 갔었던 카페 데우스에서 보자.”
“그래 좋아. 나 하던 일만 마무리 하고 바로 내려갈게.”
“오케이. 너무 서두르지 말고 하던 일 천천히 마무리 하고 와. 이따 보자.”
전화를 끊었다. 마침 짜증나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차에 잘 됐다. 요셉은 팀장에게 친구가 찾아와서 잠시 외출하고 오겠다고 보고한 후 건물 밖으로 나왔다. 종수와 만나기로 한 카페로 서둘러서 걸어간다. 걷는데 발이 조금 불편하다. 얼마 전 새로 산 로퍼를 오늘 처음 신었다. 뻣뻣한 가죽이 아직 발에 익숙하지가 않아서 어딘가 어색하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하다. 하지만 불편함이 크게 신경 쓰이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 불편함이 새 신을 신었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종수로부터 카페에 도착해서 자리를 잡았다고 톡이 왔다. 톡을 확인한 요셉은 좀 더 빠르게 걷는다. 카페 데우스에 도착해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창가에 앉아 있는 종수의 뒷모습이 보인다.
“종수야!” 요셉은 종수 맞은 편에 앉았다.
“요셉아, 빨리 왔네. 나 때문에 일 하다 말고 온 건 아니지?”
“아니야. 너 뭐 마실래?”
“나는 아메리카노.”
요셉은 아메리카노와 에스프레소를 주문했다.
종수가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마시면서 말한다. “전에 왔을 때도 느꼈지만 여기 커피가 맛있어. 아메리카노가 진하고 향도 좋아. 다른 카페는 아메리카노가 이렇게 진한 맛이 안 나.”
“맞아. 여기 커피 맛있어. 그러니까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닌데도 잘 되지. 커피 맛뿐만 아니라 카페 분위기도 좋고.”
종수가 카페 주위를 둘러보며 말한다. “맞아. 프랜차이즈 아닌 곳이 이렇게 잘 되기가 쉽지 않아. 커피 맛도 맛이지만, 네 말대로 나는 이 카페 분위기도 너무 마음에 들어. 왠지 모르게 여기만 오면 편안하고 안정감이 생겨. 분위기가 아늑해. 이 근처에 올 일 있으면 나는 무조건 카페는 여기만 온다니까. 내 주변에 커피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카페 데우스 추천 많이 해줬거든. 와본 사람들은 다 좋아라 하더라고. 안 좋아할 수가 없지.”
“그 정도로? 나도 좋아는 하는데 너만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다. 하하.”
“그런데 요셉아, 아까 전화 받았을 때 목소리가 안 좋던데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사무실에서 시끄럽게 전화하면 안되니까 일부러 작게 얘기한 것도 있고, 사실은 오전에 좀 심하게 스트레스 받는 일도 있었어. 그래서 목소리가 그렇게 들렸나? 안 그래도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 좀 식히려고 했는데 마침 너한테 전화가 온 거 있지. 완전 반가웠어! 네가 반갑기는 처음이었어.”
“하하. 전혀 반가워하는 목소리가 아니던데. 아무튼 뭐 때문에 스트레스가 심한 거야?”
요셉은 협력업체와 함께 진행하는 프로젝트에 대해서 종수에게 말했다.
요셉의 말을 다 들은 후 종수가 말한다. “난 또 무슨 큰 일 있는 줄 알았네. 내가 볼 때는 심하게 스트레스 받을 일이 아닌데.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는 직장생활이 어디 있어?”
“야, 네가 몰라서 그래. 이 프로젝트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데.”
“중요하지 않다는 게 아니라. 요셉아! 일하다 보면 그 정도 문제는 매번 발생하기 마련인데 네가 유독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듯 한데. 세상에 네 입맛에 딱 맞게 일하는 협력업체가 있을 거 같아? 각자 다 생각의 차이도 있고, 일하는 방식에 차이도 있는데 어떻게 네가 원하는 대로 딱 맞춰서 결과를 가지고 오겠어. 세상에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어. 실제로 그 사람들이 일을 못하는 건지 아니면 네 기대가 너무 높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도 그 정도의 문제랑 그 정도의 스트레스는 허다하게 일어나고 계속 반복 돼. 난 또 뭐 엄청난 스트레스인 줄 알았네. 너 같은 성격이 꼼꼼하게 일은 잘하는데, 예민해서 자기 자신을 굉장히 피곤하게 만든다니까.”
“나도 스트레스를 안 받을 수 없다는 걸 알아. 어느 정도 감수하면서 일해야 하는 것도 알고 있고. 그런데 이 프로젝트가 나한테 너무 중요해서 그래. 그래서 스트레스가 더 큰 것 같아. 진짜 내 평가에 엄청 중요한 프로젝트야. 올해 고과 잘 받아야 한단 말이야. 그리고 객관적으로 봐도 진짜로 그 협력업체 사람들이 일을 그렇게 잘하는 건 아니야. 이럴 줄 알고 내가 외주 주는 걸 반대했었다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 뭔지 알겠어. 그 사람들 일 못할 수도 있지. 잘 해도 네 성에 안 찰 수도 있는 거고. 그런데 내 말은 아마 너는 지금보다 덜 중요한 프로젝트였어도 지금과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고 지금 협력업체보다 더 일 잘하는 곳을 만났어도 지금과 같은 스트레스를 받았을 거라는 거야.”
“야! 그런 게 아니라니까. 종수야 내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무슨 말인지 안다니까. 아는데.. 바꿔 생각해보면 네가 협력업체면 갑의 입맛에 딱 막게 결과를 내 놓았을 거 같아? 그게 그렇지 않다니까. 그냥 원래 그런 거야. 누가 됐든 갑은 을이 성에 안 차고, 누가 됐든 을은 갑의 요구를 맞추기 쉽지가 않은 거라고. 네 성격상 스트레스를 필요 이상으로 받아서 그렇지 회사 아주 잘 다니고 있는 거 같은데. 아주 꼼꼼하게 협력업체도 잘 갈구고 말이지.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하겠어. 역시 너는 관운이 좋은 가봐.”
“야, 여기서 관운이 왜 나와? 내가 이 회사를 언제까지 다닐지 알고 승승장구야? 앞으로 뭐 먹고 살지가 걱정이다.”
“지금 회사 잘 다니고 있고만. 쓸데없이 뭐 먹고 살지 걱정은 왜 하는 거야?”
“너는 그런 걱정 없어?” 요셉은 종수 뒤 쪽을 흘끗 보면서 말한다. “너도 회사를 평생 다닐 수는 없을 거잖아. 우리가 월급 받아봐야 얼마나 모을 수 있겠어. 회사가 우리 인생 책임져 주는 것도 아니고 말이지. 언젠가 자기 일을 찾아야지. 하기야 너는 벤처 창업 멤버니까 회사가 아주 잘 돼서 상장도 하고 그러면 우리사주로 크게 한 몫 챙길 수도 있겠다.” 요셉은 말을 하면서 종수 뒤를 흘끗 흘끗 반복해서 봤다. 말을 마치자마자 에스프레소를 한 모금에 다 마셨다.
“우리 회사 잘 되려면 아직 멀었어. 네 말대로 나도 고민 왜 없겠어. 무지 많지. 그런 생각하면 머리 아프니까 일부러 외면하면서 사는 것도 어느 정도 있지. 나도 말은 안 해서 그렇지 고민도 많고 불안하지.”
“그래도 너는 운이 좋은 게 처갓집이 엄청 부자잖아. 나 너희 신혼집 보고 깜짝 놀랐잖아.”
“야, 장인 돈이 내 돈이냐?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리고 그 집은 3년만 살기로 한 거야. 3년후에 나와야..” 종수가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멈칫한다. “그런데 너 아까부터 자꾸 어딜 보는 거야?”
종수가 뒤를 향해 몸을 조금 돌린다.
“종수야 뒤에 보지마. 나 방금 눈 마주친 거 같아.”
“누구랑?” 종수가 몸을 돌리다 말고 말했다.
“우리 반대편 끝에 있는 여자랑. 바로 너 등 뒤 맨 끝 좌석.”
“그럼 그렇지. 얘기하는데 자꾸 어딜 그렇게 보나 했네. 예뻐?”
“응. 내 이상형이야. 전에도 이 카페에서 한 번 봤었어. 오늘 스타일 너무 괜찮다. 품이 큰 푸른색 셔츠에 베이지색 슬랙스를 입었어. 신발은 하얀색 스니커즈를 신었고 왼쪽 발목에는 은색 발찌를 했어. 바지 밑단과 스니커즈 사이에 발찌가 눈에 확 띈다. 단정하게 입었지만 칼라 매치를 잘 해서 세련돼 보이고 발목에 발찌는 내면에 감춰 놓은 화려함을 살짝 드러내는 거 같아. 안 봐도 어떤 스타일인지 알겠지?”
“야, 안보고 어떻게 알아?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 엄청 궁금하네. 나 뒤 돌아봐도 돼?”
“아니 안돼. 그러면 저쪽에서 눈치 챌 거 같아.
“눈치 채면 어때? 하여간 소심해가지고. 야, 우리 조각 케익 하나 먹자.”
종수는 자리에 일어나 카운터로 갔다. 카운터로 가면서 요셉이 말한 여자를 곁눈질로 봤다. 케익을 주문하고 기다리는 동안에도 흘끗 한 번 보고 요셉을 쳐다 봤다. 요셉도 종수를 쳐다 봤고 둘은 눈이 마주쳤다. 종수는 케익을 들고 자리로 돌아 왔다.
종수가 케익 한 조각을 입에 넣고 말한다. “둘 중에 벽 쪽에 앉은 사람 말하는 거 맞지? 진짜 괜찮더라. 이 자식 눈만 높아가지고.”
“그렇지?” 요셉도 케익 한 조각을 입에 넣었다.
“요셉아, 가서 말 걸어 보는 거 어때? 명함 주면서 번호 물어 봐. 넌 대기업 다니니까 명함 주는 것도 어필이 될 수 있어. 무작정 번호 달라는 거 보다 나을 거 같은데?”
“아.. 안돼. 나 그런 거 못 해.”
“야야! 못 하는 게 어디 있어? 번호 잘 물어보는 사람들은 날 때부터 할 줄 알아서 하겠어? 그냥 용기 내서 하는 거겠지.”
요셉은 한참 말 없이 고민을 한다. “아니야. 못하겠어. 적어도 오늘은.. 마음의 준비가 안 됐어. 다음에 만나면 해야겠어.”
“다음에 만날 줄 어떻게 알아?”
“두 번이나 만났다는 건 여기 자주 온다는 거 아닐까? 내 생각에 다음에 또 볼 수 있을 거 같아. 운명이라면 또 만나겠지.”
“운명 같은 거 믿지도 않는다는 놈이. 너 말 잘했다. 너희 누나가 점 봤을 때 곧 만난다는 그 인연이 저 사람일 수도 있는 거잖아. 인연이 왔으면 잡으려고 노력을 해야지. 네 어머니께서도 기도한다며 네가 그 기도에 부응해야지.”
“그거랑 지금 이 상황이랑 무슨 상관이야?”
“왜 상관없어? 운명이 왔으면 붙잡아야지. 이 멍청한 놈아.”
“어..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간다.”
“빨리 가서 말 걸어 봐.” 종수가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건 좀 아닌 거 같아.”
그녀는 함께 있던 사람과 카페를 나갔다.
“야 됐다, 됐어. 너 학교 다닐 때는 연애 잘만 하더니 요새는 왜 그러냐?”
“그때는 자연스럽게 만난 거잖아. 비교할 걸 비교해.”
“따라나가서 말이라도 걸어보지. 아유, 답답해가지고는.” 종수가 시간을 확인한다. “난 사무실 들어 가봐야겠다. 너도 들어가서 일해.”
“그래. 종수야 다음에 또 보자. 세아씨한테도 안부 전해주고.”

그날 밤. 요셉은 자려고 침대에 누웠다. 카페에서 봤던 그녀가 자꾸 떠올라 잠이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눈을 떠도 어두운 방안은 그녀 모습으로 가득하다. 종수 말대로 용기를 내볼 걸 그랬나 하고 후회가 된다. 운명을 놓친 게 아닌지 불안하다. 다음에 만나면 꼭 말을 걸어야지 하고 다짐했다. 하지만 요셉은 그날 이후로 카페 데우스에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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