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으로 들어온 나정은 씻고 나와 거실에 누워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켰다. 소영에게 메시지를 보낼까 망설이다가 보내도 괜찮은 상황일지, 보낸다면 뭐라고 보내야 할지 확신이 서지 않아 결국 그만두었다. 기다리지는 않았지만, 소영으로부터도 메시지는 오지 않았다.
이번 일을 통해 나정이 스스로에 대해 다시 한번 깨닫게 된 것은, 자신이 지극히 충동적인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일이든 관계든 충동적으로 시작하기 일쑤였고, 언행에 있어서도 충동성이 강했다. 돌이켜 보면 마음에 든다거나 옳다는 판단에 의해 결정하는 게 아니라, 충동성을 조절하지 못해 마땅한 이유도 없이 덜컥 결정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소영과의 관계 역시 충동적인 사건으로 시작된 관계였기는 하지만, 어쨌든 오랜만에 소중하게 느낀 관계가 자신의 충동적인 언행으로 인해 끝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자신을 괴롭혔다. 그러면서도 나정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여기며 잠을 청했으나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어디서든 머리를 댈 곳만 있으면 금방 잠이 드는 그녀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가까스로 잠이 들었다가 아침에 일어난 나정은 누운 채로 한 번 기지개를 켰다. 여전히 피로했지만 몸을 일으켜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와 방에 들어가 노트북을 켠 뒤 워드파일 하나를 열었다. 파일 맨 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아랫집 소녀>
나정은 경험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해소하는 데에는 뭔가에 몰두하는 방법이 가장 좋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 글에 몰두하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나정은 곧 이 파일을 닫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다. 먼저 새로운 공모전 소식은 없는지 찾아 기록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정보를 더 찾아보던 중 전부터 참가를 고민했던 합평회를 무심코 떠올린 나정은 즉석에서 담당자에게 메일을 보내 참석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새로운 워드 파일을 열어 글을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물론 충동적으로 시작한 글이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나정은 노트북으로 이메일을 확인했다. 새로 온 메일은 없었다. 그러자 나정은 최근에 단편소설을 제출한 공모전의 인터넷사이트에 접속했다. 공지사항에 <당선작 알림>이라는 내용이 눈에 띄자 반사적으로 클릭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오후 2시는 합평회 시간이다. 파란 대문에서의 사건이 있던 다음날, 충동적으로 참가를 결정했던 그 합평회였다. 나정은 집에서 나와 돌계단을 걸어 내려가다가 잠시 멈춰 1층의 집들을 바라보다가 이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녀가 나가자 파란 대문이 끼익 하고 소리를 냈다.
이번 합평회는 스터디카페에서 진행되었다. 약속했던 시간이 되자 나정을 비롯한 사람들이 도착해 각자의 작품을 읽고 난 후의 의견이나 평가를 주고받기 시작했다. 나정 역시 자신의 의견을 말한 다음 사람들이 말하는 내용을 노트북으로 받아 적었다. 그런데 두 시간 동안 이어진 합평회가 끝나고 짐을 정리하고 있는데 맞은편에 앉아 있던 또래의 남성이 다가왔다. 나정이 무슨 일이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망설이던 그가 말을 꺼냈다.
“아까 나정 씨의 작품에 대해서 말하지 못했던 게 생각나서요. 말할까 말까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합평회니까 솔직하게 말하는 게 그쪽한테도 좋을 것 같아서...”
“네, 무슨 얘기인데요? 말씀해 보세요.”
그의 말은 두서가 없어 정확히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나정은 마디마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단어를 되새기며 몇 번을 되물어야 했다. 그는 나정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마지막에 덧붙였다.
“제 설명이 빈약했는지 모르겠는데 뭐라고 해야 하나... 왜, 있잖아요. 재밌어서 일단 보긴 했는데 다 보고 나면 뭘 봤는지 기억이 안 나는 거. 충동적으로만 쓴 글 같아서 작가가 무슨 말을 하고 싶어 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남성은 나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송구한 듯 고개를 숙인 뒤 모임장소인 스터디카페를 빠져나갔다. 나정은 그가 실례되는 말을 해서 죄송하다는 건지 말주변이 없어서 죄송하다는 건지 헷갈렸다. 둘 다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정은 엉성한 그의 말을 영양가가 없다고 판단하고는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하지만 스터디카페를 나와 집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나정은 판단을 번복하여 노트북을 꺼내 자신의 작품을 열고는 그의 말에 입각해 천천히 살폈다. 그리고 한참을 살핀 뒤 자신의 글의 문제점을 찾아낸 나정은 이를 해결하기 전까지는 합평회에 나갈 의미가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