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환대 10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다 Oct 25. 2024

[소설] 환대 - 마지막 화

파란 대문에서의 사건으로부터 상당한 시일이 지난 며칠 전, 나정은 소영에게 몇 개의 메시지를 보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벼운 내용을 담기도 했고, 그때 내뱉었던 말에 대한 해명과 같은 무거운 내용을 담기도 했다. 하지만 답장은 한 번도 없었다.

아마도 지금쯤이면 소영은 방학이 끝나 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이다. 나정이 만나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등교시간에 맞춰 나가 볼 수도 있었다. 혹은 소영의 집 문을 두드릴 수도 있었다. 예전에 소영이 그랬던 것처럼. 하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소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는 염치가 없었다. 마주 보고 사과를 할 자신이 없었던 나정은 소영에게 건넬 편지를 썼다.

하지만 부족한 느낌이 들었다. 편지뿐 아니라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뭔가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하던 중 전에 쓰다가 말았던 <이웃집 소녀>를 떠올렸다. 분위기를 바꿔볼 겸, 나정은 노트북을 들고 집을 나섰다. 발품을 팔며 글을 쓰기 괜찮은 카페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글을 쓸 수 있는 새로운 보금자리에 둥지를 틀기 위해서였다. 적당한 장소를 찾아낸 나정은 저녁시간에는 이곳에서 글을 썼다. 이전과 달리 처음부터 끝까지 커다란 줄기를 구성해 써나가니 스스로도 놀랄 만큼 진도도 빠르고 내용도 자연스러워졌다.


천가방을 어깨에 멘 나정이 버스정류장에서 내리면서 핸드폰을 열었다. 그리고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엄마. 뭐 해?”

“뭐 하긴, 그냥 집에 있지. 웬일이냐, 네가 먼저 전화를 다 하고?”

“웬일은 무슨 웬일이야. 그냥 잘 있나 전화해 본 거지 뭐. 밥은 먹었어?”

몇 마디 안부를 주고받다가 나정이 본론을 꺼냈다.

“공모전에 당선됐어.”

“어? 뭐라고?”

엄마가 되묻자 나정은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공모전에 낸 내 소설이 당선됐어. 출판사에 가서 계약서 쓰고 오는 길이야. 내 이름으로 책이 나올 거라구!”

“어머나, 세상에! 정말이야? 어머, 잘 됐다, 잘 됐어. 잘했다 얘…”

나정의 엄마는 놀라움과 감격스러움이 섞인 반응을 보이다가 울먹였다. 나정의 눈에도 눈물이 맺혔다. 통화를 끊은 뒤 나정은 길을 걸으며 가방 안의 갈색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내 천천히 살폈다. 거기에 적힌 자신의 이름을 나정은 손가락으로 한참 매만졌다.

제목으로 눈을 돌린 뒤에는 자연스레 소설 속 등장인물의 모티브가 된 사람을 떠올렸다. 파란 대문으로 들어서며 나정은 언제나처럼 1층의 집 현관문을 바라보며 돌계단으로 향했다. 어느새 바깥공기가 많이 따뜻해졌다.

그런데 계단에 들어서자 위에서 내려오는, 그러니까 자신의 집에서 나온 듯한 사람이 서 있었다. 소영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순간처럼 시간이 멈춘 듯 아무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간이 다시 흐를 때 두 사람은 계단 아래에서 서로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머뭇거리던 두 사람은 우습게도 거의 동시에 말을 꺼냈다.

“미안해요, 언니.”

“미안해.”

오랜만에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사과를 듣고는 마주 보고 미소지었다. 나정이 먼저 물었다.

“네가 뭐가 미안한데?”

“음… 지금까지 연락을 못 해서요. 엄마가 핸드폰을 압수했었거든요. 그리고 또 엄마가 언니한테 심한 얘기한 것도 미안하고...”

나정은 핸드폰을 압수당했다는 대목에서 고개를 끄덕였고, 심한 이야기를 했다는 대목에서는 작게 웃었다. 이번에는 소영이 물었다.

“언니는 뭐가 미안한데요?”

“기억 안 나? 그때 내가 했던 말.”

얼굴이 달아오르는 기분을 느끼던 나정은 더 이상 사과할 용기를 잃기 전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너랑 있으면서 힘들었다느니, 돈을 써서 아깝다느니 했던 말들 말이야.”

나정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계단 바닥을 바라보았다. 죄인이 된 심정으로 처벌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 대답이 없어 고개를 들고 보니 뜻밖에도 소영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이내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와! 언니, 그렇게 말했었어요? 너무 해요 진짜.”

말을 마친 소영이 높은 톤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나정이 다시 말했다.

“어머님하고 대화하다가 얼떨결에 말이 헛나왔어. 진심이 아니었어. 정말이야. 미안해.”

“괜찮아요. 저도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던 거지, 언니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건 아니에요. 애초에 엄마가 먼저 함부로 말하기도 했고.”

소영이 또 웃자 이번에는 나정도 따라 웃었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나정이 위층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런데 왜 위에서 내려오는 거야?”

“언니네 집 앞에 갔다가 내려온 거예요. 얼마 전까지 시간이 없었거든요. 평일에는 낮에 학교에 다녔고, 저녁에는 엄마가 학원에 간 저를 철통같이 감시해서요.”

“그랬구나. 요즘은 저녁 늦게 집에 들어왔어. 새로 찾은 카페에서 한창 글을 썼거든. 비밀번호도 아는데 그냥 들어오지.”

“에이, 어떻게 그래요. 염치없게.”

소영이 자신과 비슷한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정은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소영은 나정의 손에 들린 천가방 속 내용물을 발견하고 물었다.

“그 봉투는 뭐예요?”

“아, 이거?”

나정이 함박웃음을 지으며 봉투를 꺼냈다. 그리고 입구를 열어 소영에게 보이며 말했다.

“놀라지 마. 이거 출판계약서야. 오늘 출판계약서 쓰고 오는 길이었어. 공모전에 냈던 소설이 당선됐거든!”

“와! 진짜, 진짜요? 와, 최고다! 와! 언니! 축하드려요!”

소영은 놀라는 소리를 몇 번이나 반복하며 나정의 두 손을 잡고 흔들었다. 흥분이 가라앉은 뒤 나정은 봉투에서 계약서를 꺼냈다. 그리고 소설의 제목이 쓰여있는 부분을 소영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언니, 이거 혹시...”

“이 글, 지금 볼래?”

소영이 세차게 여러 번 고개를 끄덕이자 나정이 앞장섰다. 집 앞에서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나정이 내밀던 손가락을 멈춘 다음, 소영을 돌아보며 손바닥을 펼쳐 도어록을 가리켰다. 손짓이 어떤 의미인지 알아챈 소영이 다가와 도어록을 향해 손가락을 내밀었다. 곧 빠른 속도로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돌계단을 지나 파란 대문까지 울려 퍼졌다.

이전 09화 [소설] 환대 - 9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