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oadSeeker길을 찾는 사람] 3부: 영혼의 길을 찾는 구도자
가을이 지나 겨울이 오고, 또 봄이 오고 여름을 지나 무수한 계절이 그렇게 흘러갔다. 현빈은 세월의 기약도 없이 그렇게 암자에 머물며 자신의 내면을 살피고 또 살피고, 고요함을 밝히고 또 일어나는 미세한 흐름들을 추적하고 지켜보았다.
아내 가영에게는 많은 설명이 필요치 않았다. 그녀도, 장인인 우향도 모두 구도자였기 때문이었다. 우향은 '자네까지 그리 될 줄은 몰랐네' 라면서 너털웃음과 함께 응원의 말을 전했다. 너무나 다행히도 가영은 진리추구자이면서도 간호사로서 현실적인 기반을 잘 다져놓았다. 이런 이유로 현빈은 더더욱 자신의 수행에 집중할 수 있었다.
세월이란 마주볼 땐 그처럼 지겨울 수 없지만 돌아볼 땐 마치 한 순간과 같은 것. 아마도 얼마만큼의 세월을 인내하며 견뎌내야 한다는 무명의 언질이 있었다면 이 같은 수행도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수행이지 고행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순간은 평온하게 지났다. 그러다 가끔, 대나무의 마디를 뚫는 듯한 고비가 찾아왔다.
무명의 맨처음 설명은 제대로 집중하는 법이었다.
"사람들은 흔히 '집중'해야 한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그런 건 제대로 된 집중의 십분의 일도 안될 겁니다. 온전히 집중하게 되면 평상시의 마음과는 전혀 다른 변성이 일어나게 되지요. 이것을 전문용어로 삼매라고 부릅니다."
현빈은 긴장을 풀고 어떤 대상에 집중할지를 정해야 했다. 돌, 나무 그루터기, 땅에 떨어져 있는 식물의 열매 등 적당한 크기의 정지된 사물은 무엇이든 상관 없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집중조차 쉽지 않았다. 집중한다고 마음 먹으면, 평소 온갖 잡생각들이 쓰나미처럼 몰려왔다. 몸은 산속 암자에 있었지만 마음은 여전히 도심 한가운데나 마찬가지였다.
시간이 약이라고 했던가. 계절에 맞게 땔감을 구하고, 밥을 지어 먹고, 빨래를 하고, 산속을 걸었다. 먹기 위한 노동 외에는 좌선 말고는 할 일이 없었기에 그는 집중하고 또 집중했다. 여름밤이면 소쩍새 소리, 낮이면 계절마다 들려오는 온갖 새소리들도 마음을 모으는데 도움이 되었다. 자연속에서 마음은 저절로 비워졌고, 비움은 집중의 힘을 끌어올렸다.
어느날 문득, 현빈은 툇마루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맑게 갠 청아한 가을하늘, 부슬부슬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현빈은 텅 빈 마음에서 느껴지는 미약한 지복을 즐기고 있었다. 얼굴에 은근한 미소와 함께.
때마침 무명이 산책에서 돌아왔다. 현빈은 은근한 희열 속에서 그것을 깨지 않으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해가 쨍쨍한데 비가 내리네요."
무명이 그의 말에 싱긋 웃으며 답했다.
"비가 오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비인가 보지요."
나중에 무명은 천안(天眼) - 제3의 눈이 뜨이는 초기 징조라고 설명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잘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계속 나아가면 됩니다.' 무명은 현빈을 격려했다.
그제서야 현빈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떠올렸다.
일곱살 쯤? 그가 어렸을 때의 일이다. 그는 양지 바른 담벼락에 앉아 허공을 바라보았다. 날은 맑았고 주위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아이의 마음에는 아무것도 들어있지 않았다. 미래에 대한 어떤 걱정도, 친구와의 번거로운 약속도, 그 어떤 것도 방해하지 않던 투명한 마음. 아이가 바라보는 하늘엔 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이에게는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누구나 다 그런 것을 보는 줄로만 알았다. 맑은 날의 보슬비는 아이가 좀 더 크고, 열살 무렵이 되자 사라졌다.
무명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모두 그런 걸 보는 건 아니라고 했다. 수행에 맞는 몇몇 사람들이 타고나는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제대로만 한다면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도 강조했다.
그렇게 또 한 달이 지났다.
현빈이 툇마루에 앉아 풀밭에 놓인 바위에 마음을 하나로 집중하던 참이었다.
갑자기 바위 주변의 풀들이 일정한 패턴으로 줄을 서기 시작했다. 잡초들이 인조잔디처럼 가로세로 줄을 맞추는가 싶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그것들은 쫙 펴진 천처럼, 초록색 스크린이 되어버렸다. 현빈은 눈 뜬 장님처럼 당황했다. 어? 이런? 살며시 비명을 지르며 마음이 흐트러지자 스크린은 사라졌고 정상 시야로 돌아왔다. 마음을 하나로 모으면 다시 풀들은 같은 패턴을 이룬 후 초록색 스크린처럼 펼쳐졌다.
"눈, 귀, 코, 혀, 피부, 우리 몸의 다섯가지 감각에는 각각에 해당되는 의식이 있습니다. 보통 기절을 하게 되면 모든 감각 의식들이 한꺼번에 다 꺼지게 되죠. 하지만 명상이 어떤 경지에 도달하면 이 각각의 의식을 의도적으로 끄고 켤 수 있게 됩니다. 그런 초기상태를 경험하신 거지요. 눈의 의식이 꺼진 겁니다."
무명의 설명이었다. 뭔가 더 생각났다는 듯, 그가 말을 이었다.
"깊은 삼매에 들면 다섯가지, 모든 감각이 다 꺼지게 돼요. 그때는 지극한 행복의 느낌이 듭니다. 몸을 상하지 않고도 마약의 몇 백배 환희의 상태에서 마음 먹는 만큼 오래 머물 수 있습니다. 또 인도의 요기들처럼 체온을 조절하고 맥박을 거의 정지한 상태로 바꾸는 것도 가능하죠. 하지만 그런 능력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무명이 현빈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면서 미소지었다.
"때가 된 것 같군요. 자리를 옮겨야겠어요."
그들은 산속의 암자에서 강가의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겼다. 다음 단계의 수행에 필요한 곳이라 했다. 이번에는 강물이 현빈의 수행을 위한 방편이 되었다.
"흘러가는 강물에는 어떤 깨달음이 있나요?"
현빈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무명은 그저 수수께끼같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미리 알고 얻으려 하면 일을 그르칩니다. 생각의 앎이 개입되면 안됩니다. 하면서 알게 되실 겁니다."
강가의 풍경은 아름다웠다. 하지만 하나의 대상에만 집중하던 이전의 수행은 그나마 쉬운 편이었다는 걸, 현빈은 깨달았다. 드넓게,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는 것은 잠깐 동안은 마음을 평온히 다독여주는 듯했다. 하지만 초점을 맞출 포인트를 찾기는 힘들었다.
며칠 동안 구름이 짙은 날이 계속되었고 소득은 없었다. 뭘 어찌 해야할지 몰라 하품이 날 지경이었다. 그렇게 몇 주의 시간이 강물처럼 흘렀다.
그날은 여느날처럼 화창한, 태양이 높이 솟아오른 시간이었다. 파란 하늘엔 뭉개구름이 강물을 따라 유유히 흘러갔다. 현빈은 평소처럼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캠핑의자를 펴고 앉았다. 5월의 햇살이 따가운 정오 무렵이었다. 산들바람이 그의 뺨을 어루만지듯 스치고 강물에 닿을 듯이 늘어진 버드나무 가지가 하늘거렸다. 파란 하늘에 구름이 태양을 지나는 순간, 강물에 은빛 물결이 펼쳐졌다. 너무나도 드넓게, 아름답게 빛나는 윤슬이 그 모습을 활짝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마치 수천, 수만 개의 다이아몬드가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듯 강물에 윤슬이 펼쳐졌다. 현빈이 윤슬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수많은 윤슬들이 현빈의 마음에 훅- 하고 쏟아져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른 특별한 뭔가가 있었다. 그는 무수한 빛조각들을 마음에 모으기 시작했다.
그는 강 위에 펼쳐진 보석들과 하나가 되었다. 그것은 그저 반짝이는 빛들이 아니었다. 무수한 빛들은 하나의 거대한 덩어리가 되었다. 세상의 모든 사물들이 그 빛과 하나가 되었다. 그의 마음 속 그늘, 수없이 세워져있던 벽들에 빛이 스며들었고, 결국 하나가 되었다. 하나가 된 빛은 내면 깊은 곳의 빛을 일깨웠고 마음을 통째로 녹이기 시작했다. 안과 밖의 경계가 사라졌고, 모두 하나가 되었다. '나' 라는 경계가 완전히 녹아내리자 우주는 단 하나의 거대한 빛이 되어 너울거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현빈은 빛의 황홀경에서 깨어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드문드문 반짝이는 윤슬, 파란 하늘과 구름, 그리고 산들바람과 나무들... 모두가 그대로였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는 어느 선사의 말이 떠올랐다. 당연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말이었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지나간 일들이 모두 일장춘몽, 길고 길었던 꿈처럼 느껴졌다.
*
현빈은 얼마간의 시간은 참고 또 즐기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던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무명과 마주 앉아 차를 마셨다.
그는 언제나처럼 입가에 미소를 띄고 물었다.
“무엇을 보셨습니까?”
현빈이 싱긋이 웃으며 대답했다.
“너무나 큰 것을 보았고 많은 것들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직 하나만을 보았습니다.”
무명이 유쾌하게 웃으며 물었다.
“이제 세상으로 나가 악마를 찾으셔야지요.”
현빈은 싱긋 웃으며 합장을 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들 사이에 의미심장한 무언의 미소가 오갔다.
- 로드시커 3부 : 영혼의 길 - 구도자의 불꽃
- EP5 : 하나를 찾아서
<끝>
EP6에서 만나요.
<작가의 말>
『로드시커』는 욕망, 마음, 영혼—세 가지 길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욕망의 길에서 추락한 주인공은, 성공적으로 마음의 길을 걸어왔지요.
이제 영혼의 길을 걷고 있네요.
그는 과연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게 될까요?
독자 여러분은 지금 어떤 길 위에 서 있나요?
자신을 돌아보며, 끝까지 함께 걸어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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