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딸 사랑
가락수산시장 새벽 3시.
아빠가 수산시장에 가야겠다고 했을 때
"아빠, 저랑 꼭 같이 가요"
남편에게 "혹시 내가 애들 유치원 등원 전에 못 올 수도 있으니, 애들을 잘 깨워야 한다."
부탁하고 새벽 공기를 마시며 친정 아빠와 단둘이 처음 외출을 했었다.
아빠는 그날 무척 결연한 의지에 찬 얼굴로 가는 내내 한마디 말도 하지 않으셨다.
아빠는 7남매의 둘째다. 아들 셋, 딸 넷 중에 둘째다.
스무 살에 혈혈단신 한양 땅에 올라와서 자수성가하였고, 딸 둘을 두었다.
그 7남매 중 유일하게 아들이 없는 집,
큰고모가 아들 둘과 딸 하나를 두고는 다른 형제들은 모두 아들 형제, 삼 형제를 두었다.
일 년에 몇 번 할아버지, 할머니가 오시거나, 친척들이 서울에 오면 지극정성 밥상을 차리고, 대접을 융숭하게 하여도
"아들이 없어서 어째"
서슴없이 엄마에게 찌르며 해대곤 했었다.
아빠는 서울살이에 애들 셋은 무리라며
"내가 안 낳는 것인데 별참견"
다른 일로 부부싸움을 하여도 아빠 앞에서 엄마에게 "아들이 없어서"라는 말을 입에도 올리지 못하게 하곤 하셨다. 그래도 참 시누이들은 못 말리는 법이다. 가슴을 후벼 파며 쑤셔 댔었다.
고모들은 그래도 우리에게는 이미지 관리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특히 7남매의 가장 큰 조카인 내게는 자주 말하곤 하였다.
"너의 아빠가 너를 바닥에 내려놓은 적이 없다. 시골에 와서도 밤새 깊이 잠들 때까지 너를 안고 재우고 했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해도 그저 듣기만 해도 사무친다.
내 몸에 스며들어 있었을 사랑. 그리고 그건 참 힘이 된다.
큰손주가 태어났을 때 엄마가 "만세"를 불렀다고 한다.
그 만세가 아들 둘 둔 시어머니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말은 하지 않았어도, 그 아들 타령에 얼마나 마음이 다쳤을까!
둘째를 임신했었을 때, 같은 동네 사는 내 동생에게 나는 미안했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는 얼굴을 들 수가 없었고, 유산 이후에는 동생의 병원 살이 마음 아픔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동생은 결혼 후 8년 동안 아기가 생기지 않았고, 3년 후부터는 전국에 안 가본 데 없이 자식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아흔이 넘으신 증조 시할아버지가 계신 경상도 집안에 뭐라는 사람 없어도 조카가 태어난 그 순간까지 엄마와 나는 알 수 없는 죄책감과 허상에 흔들리는 동생을 어떻게 다독이나, 누구도 쉽사리 입에 담지 못했다.
그러다 어느 날,
전복을 참기름에 볶아 찹쌀 보자기를 담가두고 달여 먹이면 좋다고, 아빠가 저녁 식사 때 엄마에게
"스무 마리를 살까? " 옆에서 듣던 나는 "아빠, 내가 살게요" 하고 길을 나섰다.
손바닥 크기만 한 자연산 전복 서른 마리를 사 왔던 것 같다.
그리고 별짓을 다 해도 안되던 일이 이후 두 달 뒤쯤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이후 나는 전복전도사가 되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주변에 세 명이 임신을 해서 이쁜 아가를 만났다.
조카를 만난 그 순간까지 동생이 감당했던 주삿바늘. 한약. 마음 앓이를 상상이나 하겠는가!
그리 만난 조카 전봉이. 태어나서도 전복을 좋아해서 열 살까지도 내가 '전봉이' 애칭으로 부르며 장난을 치곤 했다.
아미가 어여쁜 울 조카가 내일 초등학교를 졸업한단다.
하고 싶은 거 다 해라! 건강해라! 전복이! 전봉이!
* 위 사진은 2024년 4월 전복밥입니다.
전복보약 레시피
1. 전복 15마리 정도를 깨끗이 씻어 이를 빼고, 내장과 분리합니다.
2. 남비에 참기름을 한 바퀴 두르고, 볶습니다.
3. 불린 찹쌀(한 줌)을 면보자기에 싸서 남비에 담가 주세요. (불린 찹쌀 그대로 넣기도 함)
4. 볶은 전복과 찹쌀에 물을 붓고 약불로 달입니다.
5. 갈색으로 변한 약물을 일주일간 아침저녁 한 컵씩 마시면 좋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