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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틂씨 Apr 19. 2021

그녀는 매일 나를 데리러 나왔다

오늘을 견디게 해주는 어떤 기억들





버스에서 내려서 언덕위의 재래 시장 골목을 지나면 내가 살던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단지 맨 앞에는 붉은 벽돌로 된 그다지 크지 않은 담벼락 같은 것이 아파트 이름과 함께 서 있었다. 거기 늘 엄마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지. 대게는 집에서 설거지를 하다 막 나온 차림으로. 가끔 비라도 오면 그 길은 정류장까지 이어지기도 했고. 핸드폰이 없던 시절이었다.  




야간 자율학습이나 보습 학원을 마치면 어느새 하늘이 어둑해지곤 했다. 엄마는 내가 끝날 시간에 맞춰 매일 단지 앞에서 나를 기다렸다.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빨간 벽돌 담벼락부터 살핀다. 오늘도 엄마가 거기서 날 기다리고 있으면 좋겠는데! 그녀가 보이면 손을 흔들었다. 든든하고 안전한 기분. 하는 이야기들은 별게 없었다. 수고했다거나 고생했다거나, 피곤하지 아니면 배고프지, 아니면 가방 무겁지 들어줄게 같은 말들. 막상 엄마에게 무거운 가방을 맡긴 적은 없지만, 그 말을 듣는 건 좋았다. 사랑한다는 말처럼 들리니까. 단지 입구에서 우리집까지는 그렇게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엄마는 부지런히 그 길을 나와 함께 걸어주었다. 


우리는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의 3층에 살았다. 시공사가 에너지 낭비를 줄인다며 애초에 2층과 3층에는 엘리베이터 출입문을 만들지 않는 통에 엘리베이터는 1층에서 곧장 4층으로 연결되었다. 어쩔 수 없이 계단을 이용해서 3층까지 걸어 올라가야 했다. 복도식 아파트의 계단은 다른 계단실처럼 폐쇄적이지 않은데도, 나는 어둑해질 무렵부터는 계단을 혼자 올라가는 것이 싫었다. 거기선 생각보다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거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엄마는 배웅을 빼먹지 않았다. 데리러 나오지 않은 날은, 필시 뭔가 할 일이 있거나 바쁘게 뭔가를 하다가 까먹은 탓이다. 그걸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엄마가 데리러 오지 않는 날엔 불같이 짜증을 냈다. 불안했으니까. 매일 데리러 올 것처럼 말해놓고선, 나를 길들여놓곤, 오지 않다니! 기대가 무너지는 것이 싫었다. 십대의 나는 불안하고 무섭다는 말을 할 줄 몰라서 대신 화를 냈다. 


아파트 1층을 지나, 2층과 3층을 통과하는 어두운 계단이 무서웠다. 1층에는 늘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지만, 2층과 3층에는 센서등이 달려있었다. 센서등이란 아무래도 조금 느지막해서 1층에서 2층으로 오르는 동안엔 2층의 센서등이 켜지지 않는다. 2층에서 3층도 마찬가지였다. 구체적으로 그 어둠이 싫었다. 뭐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기분. 엄마가 없는 날엔 1층에서 일단 심호흡을 하고 3층까지 뛰었다. 두 칸씩을 한꺼번에 올라가면 조금 더 빨리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럴 에너지가 없는 날엔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을 눌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4층의 센서등이 켜지고, 그러면 3층까지 천천히 걸어 내려올 수 있었으니까. 


계단을 혼자 오르는 일이 무섭다고 솔직하게 말하면 됐을 일을, 나는 왜 오늘 데리러 오지 않고 약속을 어기느냐며 어깃장을 부리곤 했다. 그러면 엄마는 그냥 미안해, 하고 사과를 해주었다. 그게 사과할 일이 아니라는 걸 엄마도 나도 알고 있었지만, 엄마는 사춘기인 내가 하는 뾰족한 말들을 대게는 그냥 들어주었다. 사실은 엄마를 너무 좋아해서 쉽게 서운해진다는 말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예전에도 지금도 나는 쑥스러워서 말랑한 말을 하지 못하는 고장난 로봇 같은 사람이라서. 






작고 작은 순간들이 쌓여 오늘이 되었다. 수많은 그 기억들이 엄마와의 관계 아래 깔려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런 저런 굴곡의 시간을 통과해도 결국 나는 엄마에게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된다. 그때의 엄마가 내게 최선을 다했다는 사실을 알아서. 부모의 사랑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결국에는 안정을 찾아가는 걸 목격한다. 그러니까, 내 안에도 분명히 사랑과 애정으로 꽉꽉 채워진 그런 부분이 있었다. 어떤 날엔 그 기억을 붙들고 견딘다.


번듯한 성과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무엇을 가열차게 생산해내는 사람이 아니어도, 나의 존재가 지구에 던져진 쓰레기 같은 건 아닐거라고 생각하던 중이었다. 무의식 어딘가에 묻혀 잘 보이지도 않는 어느 구석에, 사랑받은 기억들이 숨어 있었다. 지금의 나를 어떻게든 지탱해주는 주춧돌 같은 기억들. 사실 이쯤되면 엄마에게 말해주었어야 하는 거 아닐까. 엄마의 지난한 사랑이 남아 지금의 나까지 먹여 살리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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