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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대로 동행 Aug 31. 2024

에필로그

고통에 품위를 부여한 글쓰기

하지만 내 안의 무언가가 뻗대고 있고 어머니에 대해 순수하게 감정적인 이미지들을, 온기 혹은 눈물을, 의미부여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싶어 함을 느낀다.     -아니 에르노 '한 여자' 중 -
 


어머니의 죽음 이후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쓴 책,

'한 여자'에서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글로 온전히 쏟아 냅니다. 그녀가 생활에 필요한 일들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아무 데서고 눈물을 흘렸던 것처럼, 지구 건너편의 저 역시 시도 때도 없이 훌쩍이던 시간을 지나 이제 마지막 연재 글을 씁니다.


유난히도 무더웠던 올여름을 지내며 아빠가 아름다운 계절 5월에 돌아가셨음을 감사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누워만 지내셨던 아빠에게  땀이 차고 욕창의 위험을 일으키는 극심한 무더위는 위험하고 괴로운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평소 꽃이 만발한 아름다운 계절에 가고 싶으시다던 소원대로 5월 5일 가장 눈부신 계절의 하루를 택해 하늘나라 본향 집으로 돌아가셨으니 가족들에게는 그나마 큰 위안이 되었습니다.


심정지가 한 번 왔을 때, 저희 가족은   연명치료 거부 의사에 서명했습니다. 평소 이대로 존엄하게 죽고 싶다던 아빠의 의견을 존중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소원대로 그 이후 만 하룻 동안 가족들을 만나 마지막 인사를 나누신 뒤, 여명이 밝아오는 눈부신 시간의 한 귀퉁이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잠자듯 평안히 가셨으니 고대하던 평생소원을 이루셨습니다.

사진도 유품도 별로 남겨진 게 없다는 아쉬움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떤 문장, 어떤 단어 사이에서는 길을 잃고 솟구치는 눈물을 마주하곤 했습니다.


그러나 글을 쓰면서 추억을 상기하고, 당신 인생 속의 아름답고 용기 있는 결들을 마침내 들춰내며 아빠를 향한 애도와 그리움의 폭풍우가  차차 잔잔한 강물로 변해 갔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야  저는 아빠의 팔십 평생에 대해 너무 많이 무지함을 깨달았습니다.  그 씁쓸함과 미안함을 추스르고자 계속 썼습니다. 연재를 하면서야  아빠가 지나온 삶의 각 고비마다 느꼈을 각양의 감정과 표정들을 마주하며 비로소 애도와 슬픔의 바다에서 헤어 나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아빠 삶의 마지막 2년여간 자리에 누워계시는 동안 조금씩 사그라드는 육체의 몰락을 지켜봤습니다. 돌아보면 그 시간이야말로 아빠가 우리 가족을 위해 선사한 눈부신 선물이었습니다.  


 그 시간들은 우리가 원 없이  사랑으로 섬기고, 아빠가 천국에 들어가기에 합당하도록 빚어진 경이로운 시간이자 당신이 가족을 위해 최선을 다해 버텨내신 시간이었기 때문입니다.


 잔인하게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이제 차츰 수그러들어  서늘하고  자애로운 가을이 성큼 다가옴을 느낍니다.

제가 직장 초년생일 때 가을의 초입에 들어서면 창밖으로 들리는 귀뚜라미 소리에 잠을 설쳐 괴로워했던 적이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필요 이상으로 예민했던 딸을 나무라지 않으시고 도리어 목발을 짚고 화단을 헤치며 귀뚜라미를 처치하느라 애쓰시던 아빠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다 큰 딸의 투정을 받아주느라 고생하셨던 아빠의 자리를 이제 맏딸이 대신할 차례입니다.

제가 귀뚜라미를 잡아주는 사람이 되어 홀로 남은 엄마 곁을 지켜야 합니다.  아마도 그것이 아빠가 맏딸에게 남긴 가장 절실한 당부가 아닐까 추측합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고통에 품위를 부여해 주는 일'이라는 작가 은유의 말처럼 날 서고 아렸던 저의 고통이 글 쓰는 시간을 통해 마모되고 둥글해지며 

 나름의 품위를 갖춰 습니다.


마모되고 둥글해지는 시간 동안 저와 함께 동행하며 연재글을 읽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고대하던 선물처럼 가을의 손짓 미세하게나마 느껴집니다.


사랑하기에 더 없이 좋은 계절, 충만히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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