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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을 몰랐다면, 나는 나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

by 청빛


물결처럼 스며드는 마음이 있다.
아주 오랫동안 가슴에 머물다, 문득 마음 가장 깊은 곳을 두드리는 감정.

그 이름은 ‘외로움’이다.


살아가며 우리는 수많은 관계를 맺는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나’와의 관계는 종종 뒷전으로 밀려난다.

외로움이라는 감정은 어쩌면 그런 나에게

“지금 너는 너 자신과 얼마나 진실하게 함께하고 있니?”라고 조용히 묻는 마음의 질문일지도 모른다.




2차 항암을 마치고 눈을 떴을 때, 창밖의 빛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 무심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몸의 통증은 하루의 일부가 되었고, 그날도 변함없이 병실 침대 위에서 하루가 시작되었다.


남편은 평일엔 일을 해야 했기에 주말이 되어서야 병원에 들를 수 있었다. 그가 집으로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 병실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면 나는 다시금 깊은 고요 속에 혼자 남겨진 사실을 마주했다.

그 감정은 ‘홀로 남음’이라는 이름으로 내 안 가장 여린 곳을 흔들며 조용히 스며들었다.


나는 괜찮은 척, 밝은 척, 애써 웃으며 하루를 지냈다.

나약함으로 무너질까 두려웠고, 그 마음조차 민폐가 될까 조심스러웠다.

그러다 문득, 내 안에서 떨고 있는 존재가 느껴졌다.

사랑받지 못할까봐 숨죽인 내면아이. 버림받지 않으려 애쓰는 그 아이를 바라볼 때면 죄책감과 수치심이 밀려왔다.


많은 이들이 암 앞에서도 ‘긍정’과 ‘희망’을 말하지만, 그럴수록 나의 아픔은 갈 곳을 잃었다.

가족과 지인들은 전화기 너머로 “앞으로 좋은 일 있으려나 봐,” “그래도 밝아서 보기 좋아.” 와 같은 말로 위로를 건넸다.

항암제로 극심한 통증이 몰아치는 날이면 나는 말없이 침묵했고, 괜찮다고 말한 날에야 사람들은 안도했다. 그래서 나는 더 자주 침묵했고, 괜찮은 척을 오래도록 연습했다.

나는 이전의 건강한 나로 보이고 싶었다. 그럴수록 암 환자로 비치는 나의 모습은 조금씩 부끄럽고 조심스러워졌다.


내 외로움은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나의 일부였고,

꾹 참고 버텨낸 아픔이었으며,

그리움으로 남겨진 마음의 조각이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와 깊게 연결되기를 바라고 있다.

나의 외로움은 가짜 연결로는 채워지지 않기에 느끼는

영혼의 허기였다.


그런 내게 따스한 위로가 되어주던 순간들이 있다.

“요즘엔 항암만 잘 받으면 괜찮대.” 그 애써 밝은 나의 말에, 친구는 내게 물어주었다.

“근데… 너는 어때?

너는 정말 괜찮아...?”


병에 대한 물음이 아니라, 나의 ‘존재’의 안녕을 물어주는 이들.

아픔을 고치려 하지 않고 그저 함께 머물며 사랑으로 있어준 이들의 말은 내 안에 조용한 울림을 남겼다.




불이 모두 꺼진 병실 한구석, 조용히 떨고 있는 내 마음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심장 위에 두 손을 올려보았다.

그때 들려오는 듯한 작은 속삭임에 마음을 둔다.


“나 좀 봐줘… 나 여기 있었어.”

내면 아이는 말없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그제야 나는 내 마음을 인정할 수 있었다.


나는 사랑받고 싶었고,


지켜지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온몸이 아프도록 외로웠다.


그 안엔 어린 시절부터 쌓여온 사랑받고 싶은 마음,

“괜찮다”라고 말해주기를 바라는 간절함,

있는 그대로의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조용한 기도가 담겨 있었다.


내 몸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무엇을 억누르고 있었는지, 어떤 감정이 잊힌 채 지나쳐왔는지를.


오랜 시간 자신을 만나주기를 기다려온 외로움은

내가 가장 약해졌을 때, 비로소 깊고 투명한 진실로 그 존재감을 생생히 드러내었다.



돌이켜보면, 정말 아팠던 건 암이 아니라

누군가의 사랑을 기다리느라 오랫동안 나 자신을 품지 못한 시간이었는지도 모른다.


‘기다림’이라는 언어는 내게 오래도록 새겨진 체온 같은 것이었다.


내가 나를 진정으로 바라봐주기를,

있는 그대로 안아주기를,

비난하거나 외면하지 않기를.

내가 언제 어디서든

나의 편이 되어주기를 바랐던 그 마음.

그 조용한 흐느낌 속에 얼마나 간절한 사랑의 갈망이 숨어 있었는지를 이제는 안다.


내게 외로움은 이 세상과 진실로 연결되고 싶다는 간절한 마음의 언어이자,


가장 그리웠던 ‘나 자신’을 다시 만나러 가는 통로였다.




나는 침대에 앉아 작은 불 하나 켜두고 나에게 편지를 써 내려간다.




사랑하는 나야


세상 그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나는 알아


얼마나 단단하게 이 어둠을 통과해 왔는지


항암치료의 시간들은 가족도, 그 누구도 대신 살아 줄 수 없는 너만의 깊고 고요한 시간이었지


아무 일도 나아지지 않은 것 같은 날에도 너는 묵묵히 그 하루를 살아내었잖아


그리고 조용히 너 자신을 안아가며 그 시간을 피어내었어


너는 흔들렸지만 무너지지 않았고, 무너지면서도 다시 일어났지


그게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네게 말해주고 싶어.



너의 잘못이 아니야 그 누구의 잘못이 아니야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내가 알아.


네가 얼마나 책임감 있게 인내하며 살아왔는지


스스로에게 얼마나 진실되게 살고자 했는지


이제는 너를 위해 이 아픔을 조금씩 내려놓아 주겠니



이제는 내 마음 깊이 진심으로 말할 수 있어


더 나아지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사랑하게 위해 산다는 걸


너는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인걸


무언가를 해내서가 아니라


그저 너이기 때문에..



무언가를 찾지 않아도 돼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돼


침잠해도 돼


무너져도 괜찮아


모든 걸 다 내려놓아도 괜찮아



이 길이 혼자 걷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많지만 나는 언제나 너의 곁에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함께 걷고 있어



그러니 잊지 마 너는 너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길 위에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 길은 외로움처럼 보이지만 아름답고,

고요하지만 깊은 사랑으로 향해 있어


세상이 모두 등 돌린 것 같은 날에도

아무도 닿지 않는 어둠 속에 있다고 느껴진 날에도


사랑은 늘 거기에 너와 함께 있었어


사랑하는 나야 기억해줄래


외로움은 결핍이 아니라,


사랑이 많고,

감각이 깊고,

진실을 원하는 영혼들이 느끼는

깊고 맑은 영혼의 언어라는 것을 말이야.


너는 정말로 사랑스럽고 귀하고

있는 그대로 소중한 사람이야



- 항암치료의 날 중 나에게로 보낸 편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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