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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작고 부드러운 것들로 피어난다

by 청빛
삶은 때때로,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시 태어나게 한다.


첫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 17일째 되던 날, 마침내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여는 순간, 익숙한 공기가 조용히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예기치 못한 고열로 퇴원이 조금 늦춰졌기에, 집은 더욱 간절히 그리웠던 공간이었다. 나를 기다리던 집은 여전히 따뜻했고, 말없이 나를 품어주었다.


시간과 기억이 잠시 숨을 고른 듯, 고요하고 투명한 틈이 방 안을 감싸고 있었다. 그 낯선 정적 속에서, 나는 조용히 소파에 몸을 기대고, 창가로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숨결이 들고 나는 리듬 속에서, 살아 있는 내 몸의 온기를 가만히 느껴본다.

눈물이 고였다. 몸이 다시 숨 쉬는 이 자리에서, 나는 삶이 나를 안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왜 이렇게 평범한 순간이, 이토록 눈부시고 경이로울까..

창가에 앉아 있던 그 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하루가 내겐 세상 무엇보다도 소중하게 느껴졌다.


살아 있다는 건, 내게 섬세하고 조용한 감각을 허락해 주는 일이었다. 그건 크고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햇살이 창을 타고 들어와 나를 감싸고, 심장의 작은 떨림에 귀 기울일 수 있다는 것. 내 안에서 천천히 깨어나는 감각들이, 존재의 진실을 속삭이고 있었다.

집에 머무는 동안, 나는 느릿하게 움직이고, 가끔은 멈춰 서서 호흡을 들여다본다. 이전처럼 바삐 걷기보다, 내 몸이 이끄는 속도에 귀를 기울이려 한다.


하루는 길을 건너려 집 앞 횡단보도 앞에 섰다. 초록불이 켜져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지만, 몇 걸음 채 못 가 숨이 차올랐다. 어깨부터 무릎까지 몸이 뻐근해지고 다리에 힘이 빠졌다. 절반도 못 건넌 채 신호등이 깜빡였고, 곧 빨간불로 바뀌었다. 뒤쪽에서 차량이 움직이기 시작하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예전 같았으면 뛰어갈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의 나는 걷는 일조차 버겁다. 가까스로 인도에 닿아 벤치에 앉아 한참을 숨 고르며 앉아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알게 되었다. 지금의 내 몸은 예전의 속도로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사실을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고통은 현실을 밀어낼 때 시작된다. 세상의 리듬에 나를 억지로 끼워 맞추는 대신, 나는 내 호흡의 리듬으로 이 현실을 천천히 통과해 보기로 했다.

씻는 일도, 걷는 일도, 바라보는 일도—이제는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처럼 느껴진다. 천천히 살아갈수록, 나는 삶의 결에 더 깊이 닿는다. 시간이 느리게 흐를수록, 그 안에서 생명은 조용히 자라나고 있었다.

통증이 밀려오면, 나는 눈을 감고 내면의 고요 속으로 들어간다.


이 느림은 더 이상 병의 흔적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더 깊이 존중하고, 나의 몸과 마음을 다정하게 마주하는 태도이다.

나는 급하지 않은 호흡 속에서, 살아 있다는 감각을 더욱 진하게 경험한다.

삶을 재촉하지 않기로 마음먹은 그날부터, 나는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있었다. 지금의 나를 지탱하는 것은 거창한 변화가 아니라, 나를 다정하게 마주하는 작고 꾸준한 순간들이다.


흰 종이에 마음을 천천히 풀어내는 일,
다 마신 찻잔을 손으로 감싸 안아 남은 온기를 느끼는 일,
저무는 하루를 가슴으로 어루만지는 일.
그리고 아픈 몸을 외면하지 않고, 부드럽게 받아주는 일.

그렇게 쌓여가는 다정함이 나를 다시 일으킨다.

별다를 것 없는 하루 속에야말로, 가장 눈부신 축복이 깃들어 있다는 걸.이 평범한 일상들이 더 귀하게 다가왔다.

사랑은 멀리 있는 감정이 아니었다.
지금 이 몸에 조용히 스며든, 흔들림 없는 고요한 진동이었다.


나는 이제 치유를 ‘극복’이라 부르지 않는다.
치유란, 결핍을 고치는 일이 아니라, 이미 충분했던 존재의 사랑을 조금씩 다시 기억해 나가는 길이었다.

나는 더 이상 예전의 나로 돌아가려 하지 않는다. 지금의 나를 품는 순간마다, 삶은 새로운 나를 만들어가고 있으니—

괜찮다고, 지금의 나도 괜찮다고 나는 오늘도 조용히, 나를 도닥인다.


뜻밖에도, 삶은 암이라는 방식으로 내게 속삭이고 있었다.

사랑을 통해,
존재를 통해,
오직 이 몸으로 살아보라고.


그 어떤 것도 붙잡지 말고,
그저 이 여정을 고요히, 천천히, 통과해 보라고.


오늘도 별일 없이 하루가 저문다.

그 '별일 없었다'는 말 안에 얼마나 많은 사랑이 숨어 있었는지를

나는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세상은, 우주는, 어떤 말도 없이 그저 조용히 나를 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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