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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나로 살아보기 위해 머리를 밀었다

by 청빛


익숙한 무언가가 조용히 나를 떠나간 어느 날, 나는 오래도록 입고 있던 자아의 껍데기가 천천히 벗겨지는 것을 느꼈다.

상실은 잃는 일이 아니라, 그 틈으로 진실을 드러내는 일이다.



첫 항암 치료를 받은 지 이 주쯤 지났을 때,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했다. 하루하루가 다르게, 베개 위, 바닥 위, 옷깃 위에 머리카락이 수북이 쌓였다.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던 일 앞에서 두려움이 자꾸만 고개를 든다.

나는 무심결에, 병실 청소를 해주는 이모님께 자꾸만 죄송하다고 말하곤 했다. 그건 내 흔적을 누군가에게 떠넘긴다는 낯섦이었고, 내가 너무 작아졌다는 걸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낯선 병실, 낯선 하루들. 익숙했던 나의 몸이 조금씩 멀어지고 있었다. 나는 그 변화 속에서 어색하게 느껴지는 나 자신을 홀로 마주하고 있다. 그 말없음 속에 조용히 머물렀다.


나는 나직이 나에게 물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무엇일까?’ 그리고 그 작고 조용한 질문 끝에, 나는 거울 앞에 섰다. 머리를 밀기로 했다. 빠져나가는 머리카락을 바라보는 것보다, 내가 먼저 선택해 머리를 미는 편이 나았다. 그건 단지 머리카락을 없애는 행위가 아니었다. 내 안의 무력감을 조금이나마 다뤄보고자 하는 의지이자, 이 고통스러운 시간을 정면으로 살아내고자 하는, 나만의 선언이었다. 어쩌면, 과거의 나와 작별하는 작은 의식이기도 했다.


기계음이 낮게 울렸다. 머리카락의 첫 가닥이 목덜미를 스치고 하얀색 면티 위로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어느새 바닥엔 지나온 날들의 흔적을 품은 머리카락이 작은 무늬처럼 쌓여 있었다. 그 안엔 웃었던 날들의 바람결이 스며 있었고, 사랑받고 싶었던 순간의 떨림이 숨어 있었다. 그 머리카락들을 떠나보내며, 나는 서서히, 다른 시간을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머리카락이 하나씩 떨어질 때마다, 내 안에서 무언가도 함께 내려앉았다. 애써 붙들고 있던 강함, 아무렇지 않은 척 웃던 순간들, 아프다는 말 대신 삼켰던 침묵들, 모든 것이 말없이 풀어지고 있었다. 차마 울지 못했던 날들의 무게가, 가만히 바닥을 향해 내려앉고, 나는 그 무너짐을 처음으로 허락했다.


거울 속엔 익숙하지 않은 내 모습이 비쳤다. 나는 맨머리를 어색하게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거기엔 낯섦이 있었고, 동시에 익숙함도 있었다. 어디선가 오래전 잃어버렸던 나와 다시 연결되는 감각이었다. 더 이상 감출 것도, 꾸밀 것도 없는 얼굴. 나는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 낯선 얼굴은 이상하게도, 가장 진실한 나를 닮아 있었다.

잘 살아내겠다고 다짐한 지금 이 순간, 그 속의 나는 어느 때보다도 나다워 보였다.

나라는 정체성은 붙잡는 것이 아니라, 벗어낼 때 더 분명해졌다.


스물다섯, 처음 교사가 되었을 무렵. 방학이면 2주씩 산속 도량에 들어가 합숙 명상을 하곤 했다. 그 시절, 스님들의 깎은 머리는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들은 세속과 작별할 때, 머리를 밀었다.

지금의 나도 그렇다. 진실한 삶을 향해, 다시 태어나기 위해 나는 조용히, 이전의 나를 보내주기로 했다.

새로운 내가 된다는 건 두려움보다 더 큰 용기를 필요로 한다. 그 용기가 내게 절실했다.

나는 이곳에 ‘죽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나는 ‘나로서 살아보기 위해’ 여기에 왔다.

생생하게, 진실로,


암 요양병원 방 한켠에서도 내 삶은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아픈 내가 아직 무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사실은 놀랍도록 큰 자유였다. 마치 출가의 순간처럼, 나는 세상이 정해놓은 가치와 기준을 내려놓고 진짜 나에게 다가가는 길을 걷고 있다. 나는 거울을 보며 나직이 말했다.

“괜찮아. 어떤 모습이든, 너는 여전히 빛나.”

그건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그날 거울 속 나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깊고, 조용히 빛나고 있었다.

예쁘지 않아도 괜찮았다.

멋지지 않아도 괜찮았다.

누군가의 시선에 들지 않아도 괜찮았다.

나는 그저 나로 온전히 살아가고 싶었다.

내가 사랑하는 나의 모습은 예쁘게 꾸민 나가 아니라 처절한 두려움을 견디고 한 발자국 나아간 나였다.

그건, 끝내 진실된 나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었다.
아픔 속에서도 ‘나’라는 존재는 묵묵히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이제 나는 안다. 몸이 나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빠져나가는 머리카락도, 때로 바닥을 치는 마음도 모두 나를 이루는 작은 조각일 뿐이라는 걸.

그 조각들이 흩어지며 오히려 더 깊은 나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완전히 설명할 순 없지만, 그 모든 것이 지금의 나를 만들고 있다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이제, 나는 진짜 나로 살아가고 싶다.

흔들리더라도, 나를 믿는 삶. 두려움 속에서도, 나를 놓지 않는 삶.

그것이 내가 선택한 진실이자 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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