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한 삶은
고통을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그 곁에 조용히 머무는데서 시작된다
3박 4일간의 항암 치료를 마친 후, 나는 요양병원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섰다. 작은 냉장고와 탁자, 텔레비전, 공기청정기, 침대가 천천히 눈에 들어왔다. 마치 여행지의 작은 호텔방 같았다. 이곳에서 2주 동안 머무를 예정이다.
짐을 풀고 창문을 열자, 선선한 바람이 커튼을 가만히 밀어냈다. 바람이 내 어깨를 스치듯 지나가자 마음에 걸려 있던 긴장이 풀리며, 꾹 눌러왔던 눈물이 불쑥 터졌다. 마치 오래도록 눌려 있던 감정들이 바람을 타고 조용히 흘러나오는 듯했다.
항암 약물을 맞고 3일째가 되자 난생처음 맞이하는 항암 부작용과 만났다. 멈출 줄 모르는 오심과 구토, 점점 사라지는 미각, 흔들리는 평형감각. 위장은 속이 타들 듯 아팠고, 설사는 멈출 줄 몰랐다. 전신 쇠약감과 숨을 들이쉴 때조차 조심스러워지는 그 날들 속에서, 나는 점점 낯선 몸이 되어갔다. 그 감각은 마치, 폭풍우에 떠밀린 작은 배에 타고 있는 것 같았다.
암의 고통은 단순한 육체의 통증만으론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내 안의 존재가 흔들릴까 두려워 스스로를 부여잡는 치열하고도 조용한 내면의 갈등이다. 몸이 아니라, 나 자신을 잃을까 두려웠던 그 시간들. 나는 그 안에서 나를 붙잡기 위해, 말없이 싸우고 있다.
방향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 감각은 결국 나라는 존재의 가장 깊은 곳까지 흔들어 놓았다.
혼자만의 공간에 앉아 있으니, 애써 외면해 온 감정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암이라는 단어에 눌려 숨죽였던 두려움, 아무렇지 않은 척 덮어두었던 외로움이 마치 천천히 떠오르는 안개처럼, 내 안을 가득 채워왔다.
나는 그저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이 침묵의 방 안에 한 사람의 숨결이라도 함께 해 준다면, 그 바람은 다만, 내가 살아 있다는 어떤 따뜻한 증거였으면 했다.
고요함은 점점 깊어졌고, 그 속에서 나는 더 뚜렷하게 나 자신의 외로움과 마주했다. 아침 회진이 끝나면, 그날그날 나를 찾아오는 유일한 이는 정해진 시간에 조리실에서 식사를 준비해 온 병원 직원이었다. 식판이 조용히 탁자 위에 놓이고 나면, 방 안의 공기가 다시 고요해졌다. 밥에서는 거의 어떤 맛도 느껴지지 않았고, 밥 한 숟가락을 겨우 삼키고 나면 곧 오심이 밀려왔다. 몇 입도 넘기지 못한 채 화장실로 향해 조용히 토해냈다. 그 순간마다 나는 스스로의 등을 다독였다. 그리고 다시, 삼키지 못할 걸 알면서도 나를 붙잡기 위해 아주 천천히, 다시 한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몸을 웅크리고 방 안에 있은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창밖으로 노을이 내려앉았다. 나는 자연스레 햇살을 따라 병원 로비를 지나 나무 아래에 앉았다. 나뭇결을 쓰다듬어 본다. 그동안은 마치 시간이 멈춘 듯한 고요함 속에서 아무 일도 없는 듯 느껴졌다.
혼자인 줄만 알았지만, 살랑이는 바람과 햇살, 이 고요한 공간이 나를 말없이 안아주고 있었다.
눈을 감고, 햇살의 온기를 느끼며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아픔이 잠시 멈추었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고통이 가득한 시간 속에서도,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머무는 일이 나를 조금씩 위로하고 있음을.
부드러운 바람이 불어오고, 버드나무 사이로 햇살이 반짝였다. 모든 것이 마치 슬로 모션처럼 천천히 흘러갔다. 나는 눈을 감고 따스한 햇살을 느끼며, 지금 여기에 머물러 있는 나를 바라보았다.
몸에 갇혀 있을 때는 미처 몰랐던 것들— 하늘의 빛, 나뭇잎의 속삭임, 그리고 내 안에서 울고 있던 감정들마저 그 순간엔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 감정들은, 너무나 당연했고, 충분히 그럴 만한 것들이었다.
“괜찮아, 이렇게 흔들려도 괜찮아.”
바람결을 따라 내 안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리고 울컥 눈물이 흘렀다. 그 목소리는 과거의 내가, 미래의 내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의 내가 되어 나를 껴안아주었다.
몸의 통증이 조금씩 잦아들자, 그제야 나는 조심스레 나 자신을 돌아볼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외로움이 나를 감싸 안고 있었음을, 이제야 비로소 알아차렸다.
나는 항암치료를 마주하고 낯선 이 요양병원에서 외로움과 하나처럼 움직였다. 그 감정은 숨처럼 들고나는 것이었고, 그림자처럼 일상 어디에나 함께 있었다. 밥을 먹을 때도, 깊은 밤 침묵 속을 헤맬 때도, 외로움은 나와 구별되지 않는 ‘존재의 결’처럼 스며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그 외로움에서 반 발짝쯤 물러나, 조용히 나 자신을 바라보았다.
그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외로움은 내가 아니었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 듯, 파도가 바위를 쓰다듬다 지나가듯, 그저 내 안을 잠시 머물다 가는 하나의 물결이었다.
외로움은, 오랫동안 나조차 나를 품지 못했던 그 자리에 처음으로 나를 조심스럽게 앉게 했다. 그 조용한 자리 곁에서 나는 내 안의 온기 하나를 꺼내어, 외로움이 들어섰던 텅 빈 마음 한 구석에 다정하게, 살며시 놓아주고 싶었다.
내 안의 감정을 외면하지 않고 바라보는 일엔, 더 섬세하고 다정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 용기는 내가 무너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힘이 아니라, 아픈 나를 밀어내지 않고 조용히 품어주는 마음이었다. 나는 지금껏 내 안의 외로움과 두려움을 피하고 싶었다.
지금의 나는 내 앞에 마주한 그 외로움을 억누르거나 밀어내지 않기로 했다. 너도 온 이유가 있겠지 하고선, 머물다 떠나도록 허락해 주기로 했다.
그리움이 스치고 나면 따스함이 남고, 외로움이 지나가면 마음 어딘가에 고요한 공간이 생겼다. 그 빈틈 속에서, 나는 처음으로 ‘외로움을 품은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외로움은 결코 나를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더 깊이 나 자신에게 이끌기 위한 조용한 다리가 되어주었음을 알게 되었다.
삶은, 아프다고 멈추지 않았다. 혼자라고 느꼈던 이 시간은 내가 나에게 가장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 순간을 데려왔다. 기댈 곳 하나 없는 순간은 때로, 내면의 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문이 되기도 한다. 그 문 앞에서 나는 마침내 멈추었고, 마주하기 두려웠던 감정들과 처음으로 눈을 맞췄다.
치유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상태가 아니다. 그 고통과도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나를 조금씩, 그러나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조용히 껴안아가는 여정이다.
나는 내게 시절인연처럼 찾아온 외로움과 두려움, 그리고 아픔과 함께 이 길을 걸어가려 한다. 날마다 스스로를 다독이며, 어느 순간엔 그 모든 감정과 더불어 숨 쉬는 내가 그 자체로 충분하다는 걸 믿어보려 한다. 그리고 언젠가, 이 긴 여정의 끝자락에서 그 모든 기억들을 부드럽게 흘려보낼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흘려보낸다는 말보다 그 기억들을 내 안에서 살며시 풀어내어, 더는 아프지 않게 그저 ‘함께했던 시간’으로 품을 수 있게 되기를.
고통은 삶을 완벽하게 만들진 않지만, 그것을 통해 나는 더 진실하고 깊이, 나 자신과 이어진다.
이제는 아픔도, 고통도 내 삶의 한 부분으로 조용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니 이렇게 아픈 나도,
이렇게 외롭고 슬픈 나도,
어찌할 바 모르는 나도 다 괜찮다고.
이 밤 병실에 앉아 나는 나를 말없이 안아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