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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는 일

by 청빛


아프다는 건 단지 상처가 있다는 뜻이 아니라, 나에게도 안아야 할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다. 내가 가장 약해졌을 때, 삶은 가장 조용한 방식으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암 진단 소식은 마치 평화로운 호수에 던져진 돌멩이처럼, 지금까지 지켜온 안정감과 평온함을 흔들어 놓았다.

건강하고 정상적으로 살아가던 삶이 어느 순간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느낌은 쉬이 지워지지 않는다. 내 몸이, 삶의 터전이,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자꾸만 작아지게 했다.


나는 세상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왔다. 잘 기능하고, 건강하며,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그중 하나였다. 그동안 건강한 신체와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나에게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30대에 암이라는 중병이 나를 압도하자, 외적 조건들은 마치 연기처럼 쉽게 사라질 것만 같았다.

사회가 요구하는 '정상'이라는 잣대에 맞추기 위해 스스로를 억누르고 애썼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아픔을 지닌 존재로서의 나를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건,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두려운 일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아픔을 숨기고, 민낯을 대면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내 마음속의 고통을 꺼내놓는 것은 나의 연약함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일이기도 하니까.

하지만 그렇게 쌓아올린 방어막들이 결국은 나의 진실한 얼굴을 가리고 내 영혼을 더 외롭게 만드는 건 아니었을까.

아픔을 가진 또 다른 존재로서의 나를 얼마나 외면해 왔는지를 돌아보게 되는 밤이다.



병원에서 만난 환자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내게 들려주는 걸 좋아했다. 그들은 고통 속에서도 삶의 아름다웠던 순간들을 꺼내 보여주었다. 폐암 수술을 받은 한 여성은 벨리댄스를 추던 시절의 우아한 자태가 담긴 사진을 꺼내 보이며 내게 조용히 웃었다. 필라테스 강사였던 환자 분은 유방암 수술을 앞두고 찍은 아름다운 바디 프로필을 자랑스럽게 펼쳐 보였다.

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지금도 정말 아름다우세요.”

그 말은 그들을 위한 말이었지만, 어쩌면 나 자신에게도 건네는 위로였다.

그들을 안아주는 일은, 결국 나의 나약함과 마주하고, 내 안의 상처를 감싸는 일이기도 했다.


고통을 숨기지 않고, 서로의 진심을 조심스럽게 꺼내어 내어놓을 때, 삶은 그 결 속에서 다시 이어졌고, 우리는 고요한 공감으로 연결되었다.

내 아픔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저 품에 안고 살아가는 일, 그 단순하고 조용한 용기가 지금의 나를 진정으로 살아 있게 한다.


고통을 나누는 데 필요한 용기, 그것이야말로 지금의 나에게 가장 절실한 사랑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나는, 조용히 마음 깊은 곳에서 피어오르는 용기를 따라 이 글을 쓰기로 했다.

누군가의 마음에 닿기 위해서가 아니라, 먼저 나의 아픔을 진심으로 바라보기 위해서.

한때 부끄러워 감추려 했던 상처들, 침묵 속에 묻어두었던 고통의 흔적들을 이제는 내 두 손으로 꺼내어

부드럽고, 정직하게 써내려가기로 마음먹었다.


이 글은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위로하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나 자신에게 속삭이는 고백이며,
다시 살아내기 위한 조용한 선언이다.

쓰는 동안, 나는 또다시 흔들릴 것이다. 이해받고 싶은 오래된 마음들이 조용히 수면 위로 떠오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나를 더 깊은 곳에서 살아 있게 할 것이다.

그러니 나의 고통과 연약함, 사랑과 회복의 여정을 그 무엇보다 진실하게 기록해보려 한다.

이 글이 언젠가, 어딘가에서 나와 비슷한 고통을 지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당신의 아픔도 괜찮다”고 조용히 말해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내가 오늘 다시 용기를 내어 글을 쓰는 이유다.





병원 퇴원을 하루 앞둔 밤, 나는 나를 다독이기 위해 잠들기 전에 노트와 연필을 꺼내어 가만히 끄적여 보았다.

독백



삶을 산다는 건 깨어지는 나와 계속해서 마주하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삶이 우리에게 놓는 도전과 시련 속에서 우리는 때로 어떤 상황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나의 취약함을 받아들이며 그 깨어진 조각들 속에서 진정한 나를 발견해내는 과정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은 결코 수동적인 과정이 아닐 것이다.


그 속에서 때로 나와 더 깊이 연결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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