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나는 나를 책임지기로 했다

by 청빛



낡고 익숙한 자아의 옷이 벗겨질 때, 비로소 마주하게 되는 내가 있다.

그 속에는 오랫동안 숨겨두었던 진실한 내가, 조용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결혼 후, 나는 ‘자기부정’과 ‘자기 사랑’ 사이에서 오래도록 머뭇거렸다. 누군가의 아내, 며느리, 딸이라는 이름표들은 어느새 내 존재 위에 겹겹이 덧씌워졌고, 세상이 정한 역할에 나를 껴맞추는 동안, 나 자신은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마음 깊은 곳에서 내가 원했던 건 아주 단순했다.

그저 나와 너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는 것.

자연스럽고 자유롭게 본래의 나를 살아내는 것.


누군가의 기대에 맞춰 만든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살아 있던 그 자유로움과 생명력을 다시금 허락하는 것.


그것이 내가 언제나 돌아가고 싶었던 진짜 나의 자리였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곳은 난임 병원이었다.

시험관 시술을 시작하기 전, 내 삶은 느리지만 나름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몸이 품고 있는 생리적 리듬, 계절처럼 부드럽게 변화하는 감정의 흐름 나는 그 자연의 속도에 귀 기울이며 살고 있었다.


“자궁도 깨끗하고 난소도 아주 건강해요.”

의사의 밝은 말은 한 줄기 희망처럼 다가왔지만 생명은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나는 자연스러운 임신의 과정을 원했지만, 남편의 난임으로 시작된 시험관 여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서로를 말없이 지치게 했다.

외로움과 공허 사이를 맴도는 동안, 나는 조금씩 삶의 온도를 잃어갔다.


시험관 시술을 이어가던 어느 날, 병원에서 면역 억제제를 처방받았다.

“환자분의 면역 지수가 높아 착상에는 방해가 될 수 있어요.”

면역억제제는 나를 암이나 질병으로부터 지켜주던 NK세포의 활동을 인위적으로 멈추는 주사였다.

생명을 잉태하기 위한 과정 속에서, 정작 나를 지켜온 생명력의 일부는 멈춰야 한다는 역설적인 설명이었다.

순간, 내 안 어딘가에서 조용한 저항이 일었다.

하지만 나는 그 느낌조차 끝내 말로 꺼내지 못했다. 직감을 외면한 채, 누군가의 판단을 내 진실보다 앞세웠다.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책임을 다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본능에 묶여 있었다.


면역억제제 링거를 다섯 병 맞고, 2주 후 물혹 하나 없던 난소에 2센티의 혹이 생겼다. 혹은 빠르게 자라났고 2주 만에 5센티까지 자랐다. 수술 당일에는 9센티에 이르렀다.

검사 결과, 악성 종양이었다.



몸은 때로 질병이라는 방식으로, 삶을 다시 바라보라고 속삭인다. 그것은 외면당한 마음이 보내는 마지막 신호이자, 나 자신에게조차 말하지 못한 상실과 감정들이 마침내 분명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수술을 앞두고 의사는 조심스레 물었다.

“항암 전에 마지막일지 모를 난자 채취를 하시겠어요?”


나는 잠시 숨을 고르고, 조용히 그러나 단호히 말했다.


“하지 않겠습니다.”


암이라는 문턱 앞에서, 나는 처음으로 오롯이 나를 위한 선택을 했다.

그 선택은 두려웠지만, 동시에 이상하게도 나는 해방감을 느꼈다.

시험관 시술이 누군가에게는 생명을 품는 여정일 수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제 그 길이 나의 길이 아님을 분명히 안다.


누구의 뜻도 아닌,

나의 몸과 삶을 나의 의지로 결정한 순간이었다.


그때 나는 처음으로 삶의 책임이 무엇인지, 그 의미를 다시금 생각해 보았다.


나에게 삶의 책임이란,

세상이 정한 옳고 그름에 나를 끼워 맞추는 일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로 살아가고 싶은지를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끝내, 나를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선택하는 것이기도 했다.


나는 너무 오랫동안 진짜 나로 살아갈 용기를 미뤄두고 있었다.


그 용기는, 누구도 대신 가져다줄 수 없는 것이었다.




내게 암이 왜 생겼는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지금 이 삶 앞에 서있는 내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였다.

그리고 눈앞에 주어진 이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낼것인가에 대한 책임은

결국 온전히 내게 있다는 것을 나는 받아들인다.


그리고 다짐했다.


내 마음과 선택을

더 이상 누구의 책임으로 돌리지 않기로.


애써 설명하거나 이해받으려 하기보다,

말없이 내 마음을 데려와 내 품 안에 온전히 쉬게 하기로.


그리고

나의 진실을 포기하지 않는 이 선택이

내가 나를 살아내는 방식이라는 것을.



내가 마주한 암과 함께 살아내는 순간들 속에서


나는 나를 오롯이 책임 질것이다


keyword
이전 09화외로움을 몰랐다면, 나는 나를 만나지 못했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