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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이비리그 Oct 27. 2024

혼란과 혼돈의 감정에 휩쓸리다

애도의 감정은 정해진 것이 없다

엄마가 정성스럽게 만든 따뜻한 밥이었지만 돌을 씹는 것 같았다.

몇 숟갈 뜨다가 숟가락을 놓고 침대로 다시 들어갔다.

"공주야 몇 숟갈만 더 먹자. 먹어야 힘이 나지."


"밥 맛이 없어 나중에 먹고 싶을 때 먹을게."


"엄마를 봐서라도 조금만 먹자. 잘 먹어서 건강회복해야지."


"지금 안 먹고 나중에 먹는다니까? 이제 그만 말해."


내가 짜증을 내도 받아주고 나를 사랑해 줄 것을 알기에 엄마한테 짜증을 냈다.

이기적으로 굴었다. 나는 불효녀에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 나쁜 년이었다.

불쌍한 엄마는 예민해진 내 성격과 짜증을 받아줘야 했다.

엄마는 나를 위해서 내 기분을 조금이라도 좋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을 알았다.

나는 모든 게 귀찮았다. 

나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뒀으면 좋겠다.


"엄마 나 좀 가만히 놔두면 안 돼? 

지금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가 없어 미안해. 

엄마보고 싶은 TV 프로그램 틀어줄 테니까 나 좀 내버려 둬."


케니 사진을 보면서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 말고는 하기 싫었고 모든 게 귀찮았다.

병원에서 수술 때문에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던 나는 도저히 그의 죽음이 믿기지 않아 직접 케니 묘비에 가서 확인해야만 했다.


"엄마 나랑 케니한테 가자. 내가 친구한테 나랑 엄마 데려다줄 수 있는지 물어볼게"

나는 엄마한테 서둘러 말했다.


엄마는 내가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공주, 조금 몸이 더 회복 됐을 때 가는 게 낫지 않을까? 그래도 가고 싶으면 가도 괜찮아."


"아니야 오늘 가야 해 내가 가서 직접 확인해야지 케니의 부재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친구가 그다음 날 시간이 된다고 해서 같이 가기로 했다.


나는 케니의 묘비를 직접 보고 인사를 하고 오면은 조금은 받아들여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는 케니를 약 두 달 만에 보러 가는 건데 제일 예쁘고 좋은 꽃들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내게 항상 좋은 것만을 선물해 줬던 케니에게 나도 케니를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다.


집 근처에 있는 꽃가게에 가서 그가 좋아하는 하얀색꽃과 다양한 색의 꽃을 골라 잘 어우러지게 만들었다.


친구와 엄마랑 함께 케니한테 갔다. 

케니한테 가는 길이 어색했고 마음이 아팠다.


케니의 보금자리는 나랑 같이 살았던 집인데 케니한테 가는 길이 다른 길이라니..


병원에 있느라 장례식장에 못 갔었는데 가지 못했던 장례식장을 들렸다.


여기서 케니가 지상에서의 마지막 날을 보냈을 거라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졌다.


나는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아 워커에 내 몸을 지탱을 해서 걸어야 했다.

큰 장례식장에 세워져 있는 수백 개 이 묘비에서 케니를 찾아야 했다.

다행히 같이 간 친구가 케니 장례식에 갔었기 때문에 케니가 있는 Section과 번호를 알고 있었다.

그래도 한 번에 찾기란 쉽지 않았다.


케니 아버지 옆에 케니의 묘비가 있었다.

케니와 함께 케니 아버지를 찾아뵌 적이 있어서 그 기억을 더듬었다.

이 넓은 곳에서 케니를 찾을 수 있다고 확신했다. 

감을 따라 찾고 있는데 케니 아버지의 묘비를 발견했다.

역시 나는 찾을 줄 알았다.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급하게 케니를 찾았다.

케니가 있는 번호를 발견했지만 묘비가 아직 없었다.

여기가 케니가 묻혀있는 곳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이상했다.

항상 나를 따뜻하게 안아줬던 그인데 그의 형체는 없고 파헤쳐진 흙만 있었다.

아직 작업 중이었다.

그가 있는 곳에 서있으면 어느 정도 받아들여질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이게 케니라고? "케니야 내가 왔어. 어떤 신호라도 좋으니 신호를 줘봐"

그냥 멍하고 어안이 벙벙했다.


갑자기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하더니 세차게 내렸다.

케니가 신호를 주는 것 같았다.

케니도 나를 봐서 슬픔을 표하는 신호인가?

우리가 마지막 인사를 못했어서 나한테 서운함을 표시하는 건가?

이 비가 그의 기쁨의 눈물 같지는 않았다.


감기가 들까 봐 일단 차에 다시 탔다. 그리고 다음에 날이 좋을 때 오기로 했다.

몸에 힘이 빠졌다. 

누워서 자고 싶었다.

나와 케니의 재회는 생각했던 것과 달리 어정쩡하게 마무리가 됐다.


집에 도착한 나는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이 깼을 때, 자정이 지나가고 있었다.

비는 그치고 바람이 불고 있었다.

차가운 땅속에 누워있을 케니가 안쓰러웠다. 

나도 케니 따라가서 옆에 같이 누워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만 살아서 숨 쉬고 있는 게 미안했다.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시니까 불쌍한 케니를 살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게 하느님 나라의 법에 어긋나면 저를 데려가시고 케니를 지상으로 보내시면 안 될까요?"


장례식장에서 받아온 사망증명서를 안고 기도했다.


감정이 격렬해지니 숨통이 조여왔다.

나는 케니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그의 목소리만이 나를 진정시켰다.

귀에 다급히 이어폰을 꽂고 녹음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가 영어과외를 한 녹음 파일이었다.

이 파일을 들으면 문장을 못 만들던 한국 학생이 시간이 지나면서 문장을 만들고 영어로 자기의 생각을 표현을 할 정도로 영어 스피킹 실력이 향상되는 것을 알 수 있다.

놀라울 정도로 케니의 인내심과 배려심을 느낄 수 있는 파일들이었다.

아이를 차분하고 친절하게 가르치는 과외 파일을 듣고 있으면 마음이 짠했다.

아이를 사랑했던 그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지 못하고 하늘나라에 간 것이 마음이 아팠고 슬펐다.


케니의 목소리가 녹음된 파일들은 나의 수면제였고 진정제였고 진통제였다.

그날부터 나는 그의 목소리만 들으며 시간을 흘러 보냈다.

사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사고로부터의 후유증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납덩이를 끌고 다니는 것 같았다.

감옥에 갇혀 케니 목소리만 듣고 있었다. 

살아있는 기쁨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엄마가 곁에서 나를 보살폈지만 나는 송장처럼 눈에 초점을 잃었다.

나는 이러다 정신이 돌아버리는 것이 아닐까 했다.

온갖 망상과 환상으로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했다.

어디서부터가 진짜고 어디서부터가 가짜일까?

나는 여전히 꿈속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내 허벅지를 세게 꼬집기도 했다.


두려움, 분노, 슬픔, 미쳐 버릴 듯한 감정이 한꺼번에 닥쳐올 때는 엄마를 찾았다.

엄마는 광기 어린 나의 행동들을 보며 엄마가 도움이 되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리고 다 지나갈 거야 괜찮을 거야 라는 말로 나를 다독였다. 


"엄마가 왜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마. 

지금 죄책감으로 너무 힘든데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면 나는 더 죄를 짓는 기분이어서 더 큰 죄책감을 가지게 되니까."


못된 딸이었다.


엄마한테 아픈 말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 몸과 혀는 말을 듣지 않았다.

누가 나를 조종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내 혀를 마비시켜 못된 말만 하도록 하는 게 분명했다.


어느 날은 내가 이런 미치광이 같은 모습에 하느님께 노하셔서 사랑하는 사람을 나로부터 또 데려가면 어떡하지?라는 공포에 사로잡혔었다.


'엄마한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짜증을 안 내야지.

엄마랑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자. 

밥도 먹고 엄마가 걱정 안 하게끔 하자.'


엄마 옆에서 엄마가 보는 TV도 같이보고 엄마가 만들어준 음식도 다 먹었다.


같은 실수는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이렇게 엄마한테 짜증만 내다가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 거기에 대한 죄책감에 나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정신을 차리고 내가 해야 할 것들을 해보자.

엄마가 8월에 한국에 가기 전에 해야 할 것들을 적어보자.

집으로 오시는 재활치료 선생님과 재활치료를 잘해보자.

그냥 내게 주어진 것을 하나하나 해결해 보자.

엄마와 있을 남은 기간 동안 엄마와 좀 더 괜찮은 시간을 만들어보자.


사고 후 한 번도 체크하지 않았던 내 메일에 들어갔다.

은행에서 온 메일들이 수두룩했다.

순간 모기지 대출이 내 머리를 타격했다.


'맞다 나 모기지 대출금액 내야 하는데 통장에 돈이 충분히 있나?'


얼른 휴대폰을 찾아 은행잔고를 확인했다.

2주는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돈이 충분하지 않았다.

이렇게 가다는 큰일 나겠다는 위기를 직감했다.

나와 엄마가 6개월 동안 같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내 사고 담당 변호사랑 연락해서 지원받을 수 있는 자금을 받아야 했다.


돈은 잔인하지만 내가 살아야 할 때 꼭 필요하다.

인정하기 싫지만 자본주의 사회에 살아가는 나는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김없이 돈 때문에 뭔가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한다.

생존의 문제에 덮인 우울함은 언제 터질지 모른 지만 모기지 대출이라는 잔인한 공격으로부터 엄마와 나를 지켜야 했다.


나는 집을 팔기로 했다.

케니와 함께한 이곳에서 도저히 케니가 없는 채로 혼자서 살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이 집에 혼자 있으면 케니 생각이 많이 나서 영영 사고 트라우마에서 빠져나올 수 없을 거라 생각했다.

숨통을 조여 오는 7억이라는 모기지 대출 족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혼자 살아야 가기에는 내게 집이 컸다. 

몸이 불편한 내게 혼자서 집을 관리하는 것은 무리였다.


나는 이 정신으로 집을 잘 팔고 새 보금자리를 얻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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