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건축에서의 높이는 어떤 의미를 지닐까? 도시를 산책하다가 인간의 욕망이 하늘을 찌른다고 생각할 때마다 걸음을 잠시 멈추고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빌딩의 꼭대기 사이에 빼꼼 내민 손바닥만 한 하늘을 겨우 볼 때라든지, 가로에 건축의 그늘이 끝없이 지속될 때마다 뜻 모를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한다. 건축가이기 때문에 갖는 일종의 집단 반성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창작인으로서 일말의 양심이라 해도 무방하다.
건축은 태생적으로 높이를 주장해야만 하는 행위이다. 말 그대로 뼈대를 세우고(建), 공간을 구축하는(築) 행위. 건축의 시발은 처음부터 지면으로부터 솟아나게 하는 데에 있다. 거기로부터 높이가 등장하였다.
내 건축 실무의 시작은 T자와 삼각자로부터였다. 컴퓨터가 등장하고부터 사라졌지만, 제도판 위에서 T자는 수평을 이루고, 그 위에서 삼각자가 수직으로 높이를 그려내었다. 이른바 건축은 수평과 수직의 조화로 이루어내는 창작물이었다. 둘 중에서도 수직선의 생성은 수평보다는 훨씬 드라마틱하고 짜릿하였다. 그리하여 높이의 추구는 건축가의 꿈이 되었다. 어쩌면 수직에 대한 탐구는 건축 발전의 역사인지도 모른다.
높이에의 열망은 때로 지나쳐서 이성을 벗어나기도 한다. 그리하여 건축의 비극이 발생한다. 예를 들어 성경에 나오는 바벨탑의 교훈은 높이에 대한 인간의 무절제함을 극단으로 보여주는 것이고, 그때마다 인간은 높이에 대한 반성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는 것이다. 영화 ‘타워링’은 건축의 높이 자랑을 실랄하게 꾸짖었다.
특히 동양의 철학이나 도덕에서의 높이에 대한 경계와 절제는 더욱 도드라진다. 노자는 도덕경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할 것을 끊임없이 주장하였고, 그러한 정신은 면면히 이어져 동양 철학의 뼈대가 되었다. 높이의 편을 든 사례로, ‘높이 나는 새가 멀리 본다.’라는 장자의 생각 정도가 있겠으나, 인간에 대한 철학자의 진의를 곰곰 생각해 보면 터무니없는 억지이다. 이처럼 높이는 인간의 욕망에서 수시로 체크되어야 할 도덕적 요소이다. 기술이 발달하였다고 하여 그러한 정신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건축의 높이에 대한 욕망은 대체로 두 가지로 요약된다. 뽐냄과 독점이다. 뽐냄이라 하면 남의 눈에 잘 드러남으로써 돋보이려는 행위이다. 때론 기술과 결합하여 시각적 표상이 되기도 하지만, 대체로 그 욕망은 일차원적이다. 높이를 이용하여 자신을 드러내려는 행위만큼 단순한 발상이 어디 있을까? 일견 천박하고 비예술적이다.
독점의 문제는 좀 더 심각하다. 대체로 고립적 영역을 만들고 풍경을 사유화(私有化)하려는 이기심에서 출발한다. 때론 욕망이 지나쳐서 자신 외의 다른 이들의 처지를 염두에 두지 않고 도시적 문제를 야기하기 일쑤이며, 늘 사회적 불균형을 야기한다. 따라서 이러한 욕망은 지극히 독선적이고 비도덕적이며 비민주적이다.
반면, 정작 우리가 건축의 높이를 고민해야 하는 부분은 다른 데에 있으며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서 기인한다. 얼마 전 나는 어느 매체에 발표한 글에서 도시의 용적률에 관하여 썼다. 부족한 주택 문제를 해결하려는 방안으로 그린벨트를 해제하여 땅의 면적을 늘리는 방안보다는 도심의 용적률을 높여 해결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게 내 글의 주장이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은 곧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그 뒤에 하였다. 용적률이란 말이 곧 건축의 높이로 오해되는 오류 때문이다. 하지만 내 주장의 진의는 수평적 발상이었지 높이의 확장에 있지 않았다.
이처럼 건축이 높아지는 데에 대한 내 생각은 아무래도 부정적이다. 매일 걷던 나의 도시 산책이 어느 날 우울해져 버렸다. 날로 줄어드는 도로 위의 햇빛에 대하여 불만이고, 고개를 한참 돌려야 마침내 보이는 하늘도 아쉽다. 해를 보지 못하는 나무에 대한 연민 또한 나의 우울을 부추긴다. 무엇보다도 끝없이 높아지는 건물을 닮은, 표정을 감춘 사람들의 브레이크 없는 욕망이 무서운 것이다.
*T자 : 건축제도에 쓰이는 수평을 그리는 도구로, 생김새가 마치 알파벳의 T자와 같은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