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다산(茶山)선생’께서 제자 ‘윤종심’에게 이런 말을 주면서 터의 개인적 소유를 경계하였다. "내가 사람들의 토지 문서를 살펴 그 내력을 조사해 보았다. 1백 년 사이에 주인이 바뀐 것이 무릇 대여섯 번은 되었다. 심한 경우 일고여덟 번에서 아홉 번까지도 있었다." 공유 되어야 할 것이 독점적으로 소유되는 허망함에 대한 놀라운 관찰이다.
‘제르미 리프킨’ 교수는 수년 전, 미래는 접속의 시대(Age of Access)가 되리라 예측하면서 소유(所有)의 종말을 주장하였다. 이 소유의 대상에는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건축물이 포함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실학자의 태도와 경제학자의 관점을 동시에 빌려보는 것은, 토지와 그 위에 건축될 건물의 소유에 대하여 일정 부분 의견의 일치를 보이기 때문이다. 실학자는 과거의 사례를 관찰하였으며, 경제학자는 미래의 방향을 예측하였다. 과거는 사실로 판명되었고, 예측된 미래는 이미 현실로 우리에게 다가와 있다.
소유물로서의 건축은 본연의 기능인 쉘터(shelter)로서든, 그렇지 않으면 경제활동의 도구로 구축되었든, 시간이 흐르면서 뭇 사람의 주위에 엄연히 존재하게 될 고정물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건축의 시작은 어떤 사람이 목적을 가지고 구축되는 것이지만, 종국에는 당사자인 사람이 떠나거나 소멸하더라도 그 자리를 지키며 유지될 하나의 풍경으로 남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건축이 개인 사유물로 소유되는 개념이 축소돼야 한다는 관점은 꽤 일리 있는 주장이다. 이른바 건축 혹은 건축하는 행위는 처음부터 경제적 행위라기보다는 하나의 문화로 규정되어야 한다는 태도가 생기는 것이며, 올바른 문화를 위하여 건축의 구축에 보다 더 신중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
물론, 건축은 주인인 소유자가 있고, 구축하는 건축가가 있음으로 개별로 평가되고 다루어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이는 건축이 하나의 창작품, 나아가서는 예술 활동의 일환으로 다루어지며 가치평가 돼도 무리가 없다는 말이 되며, 그리하여 대다수의 건축가는 이런 태도에 강한 집착과 애정을 보인다.
하지만 건축은 사람의 삶을 다루는 것이며, 그 삶이란 사회가 조직화 될수록 개별의 삶에 국한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물건으로서의 건축은 언제든지 그 주인을 바꿀 가능성을 가지는 것이며,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적 관점에서 불특정 다수의 삶이 이런저런 경로로 관여되기 때문에 개별로서의 가치 외에 다른 사회적 의무를 지니는 것이다.
우리는 그 불특정 다수가 협의하여 이루는 집단을 ‘시민사회’라 부르고, 그들이 터전을 이루는 장소를 ‘도시’라 명명했다. 따라서 도시를 포함한 현대적 삶의 정의란, 사람과의 관계로 형성되고 구축돼야 마땅하다. 그러므로 건축을 바라보는 눈이 개별의 관점과 이해의 차원을 넘어서야 하는 것이 더욱더 올바른 태도이다. 소유물이라기보다는 도시를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로 읽혀야 한다는 관점이 더 설득력을 가진다.
그리하여 건축의 완성은 소유하는 자의 입장에서의 소유물로서의 건축과, 구축된 건축을 바라보는 풍경으로의 건축과, 이 두 가지의 관점을 조율해야 하는 사회적 의미가 포함될 때에 비로소 이루어진다. 그 완성체 속의 개별 건축은 별처럼 빛나기도 하지만, 도시를 하염없이 질곡의 구렁텅이로 몰고 가기도 한다.
아~ 건축가인 나는 어떻게 입장 정리를 해야 하나? 개별의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마다 편협해지는 내 눈은 국한된 창작 의욕에 흥분됨을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창작자로서의 관점에 앞서 도시에서 삶을 영위해야 하는 생물학적 개체로서 태도가 먼저여야 한다는 더욱 진보적인 태도를 외면할 수 없다.
그때마다 제도판을 잠시 접고, 무작정 산에 올라 까마득한 도시를 하염없이 바라보게 된다. 울긋불긋 올망졸망 서로에게 기댄 집들이 참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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