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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종민 Jul 15. 2022

빈집 줄까?

도시와 건축을 말하다

그림 이종민

 

바닷바람 시원한 해변, 물기 머금은 모래밭에서 아이들이 논다.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집 다오.” 촉촉한 모래를 다지고, 허물고, 또다시 모래 동굴을 만들어 가는 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이들에게 허무는 일은 새로 만드는 일과 같다. 둘이 아닌 일체의 행위이다.


 아이들의 모래집을 보면서 어른들이 만드는 집에 대하여 생각한다. 어른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집 만들기에 몰두하게 된 것은 언제부터였을까? 삶의 목표가 된 집짓기 열풍은 개미지옥을 연상시킨다. 올라올 수 없는 블랙홀이 되어 모두를 가두고 말았다. 어른들이 멀쩡한 집을 과감하게 허무는 동력 또한 궁금하다. 이른바 재개발이라 부르는 어른들의 집 만들기도 아이들처럼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출발하였을까? 그렇지 않으면 비생산적이며 무의미하고, 하물며 불순한 것은 아닐까?


개발이란 말이 사회의 선이며 덕으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개발 앞에 여타의 가치들이 무너진 것은 물론이고, 하물며 개발에 저항하면 사회의 배신자로 치부되기도 한다. 개발의 기치 앞에 다른 가치들은 늘 무의미했다.  


예를 들어 ‘주택 보급률’과 같은 말들이 국가의 공동 목표가 되었으며, 그것의 달성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나쁜 방식의 개발도 용인되었다. 그린벨트가 허물어지고, 토착민이 마을을 버리고 강제 이주되었다. 심지어 인문, 지리, 역사적 자취들마저 흔적 없이 허물어 버린 사례들이 비일비재하였다. 많은 건물이 사라지고, 더 많은 집들이 지어졌다. 도시는 숨 쉴 틈 없이 꽉 차고, 크레인과 덤프트럭은 거리의 주요 풍경이 되었다. 이러한 어른들의 집 놀이는 아이들보다 창조적인가?


한편, 얼마 전 모 방송의 기사는 꽤 충격적이다. 아나운서는 “앞으로 부산에는 노인과 바다만이 남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고, 화면에는 사람이 살지 않는 폐허와 같은 동네의 그림들이 오버랩 되고 있었다. 빈 집이 5000호를 넘고, 학교에는 아이들이 사라졌다. 머지않은 미래의 인구 예측치는 상상을 초월한다.


오래된 마을들이 재개발의 동력을 잃은 지 이미 오래다. ‘빈집 줄게 새집 다오.’라는 구호가 이제는 먹히지 않는다. 하물며 어찌어찌하여 헌 집을 부수고 새로 지은 집들은 사람을 채우지 못하고 있다. 여느 실패한 도시에서 보듯이, 주택 보급을 달성한 도시가 목표를 잃고 또 다른 고민에 빠질 것은 분명해 보인다. 거기에 노령화와 인구 감소와 같은 악재들이 유령처럼 개입한다.


이즈음에 주택의 수를 늘여간다는 것은 바보짓에 틀림없다. 개발을 위주로 한 도시 경제에 빨간 불이 켜진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새집조차 빈집이 된다는 것이고, 교환되지 못하는 헌집의 처리 문제는 매우 심각하다.  

 

집이 도시를 이루는 살과 같은 것이라면, 시민은 살 속을 흐르는 피와 같다고 할까?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하고 살을 불려온 도시. 그 비대한 몸에 피가 흐르지 않아 드디어 숭숭 구멍이 뚫리기 시작하였다. ‘개발 열풍’과 같은 말이 공허해지자 당국도 집주인도 급해졌다. “헌 집 줄게 새집 다오.”란 말이 슬슬 꼬리를 감추고 이제부터는 “빈집 줄까?”라고 외치기라도 해야 할 모양이다.

 

산행 경험을 떠 올린다. 어느 때부터 오르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어려워졌다. 나이가 들어 무디어진 주의력과 비대해진 몸 탓이며, 목표로 한 정점이 결코 완성이 아니라는 허탈감도 한 몫 한다. 비어 가는 도시가 늙은 내 몸과 무엇이 다르랴. 살만 피둥피둥 찐 도시가 지레 늙고 있다. 애당초 이 도시는 무엇으로 채워졌어야 했던가? 살이었던가, 피였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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