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업의 기술'을 얘기하며 알게 된 것들
진아님, 일상기술연구소에 출연해주세요!
휴가를 가면서 비행기 안에서 쓰기 시작했던 글을 브런치에 올린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페이스북에 공유를 했는데 예상치 못한 댓글이 달렸다. 일상기술연구소에 출연해달라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팟캐스트에 출연해야한다는 것 아닌가. 난생 처음 받아보는 제안에 습습후후 심호흡을 하고 댓글을 달기 시작했다.
사실 처음엔 출연할 생각이 없었다. 왜냐면 <일상기술연구소>는 관심있는 사람이 나오면 종종 듣기도 하고, 방송 내용이 모아진 책을 읽기도 한터라 내가 낄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N잡을 시작한지 4개월 밖에 되지 않았고, 내가 이걸 이렇게 하는 게 맞나 하는 확신도 없는데 기술을 얘기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댓글을 달았고, 만나서 얘기해보기로 했다.
사실, 제현주님은 2016 홍진아어워즈 올해의 책 수상작의 저자이기도 하셔서 개인적으로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싶었다. 그래서 약속을 잡았다(...음?). 재미있게 얘기하다가, 긴가민가한 나의 상태를 잘 알리고, 출연하지 않기로 결정해야지, 생각했다.
4개월 실험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
예상대로 만나서 나눈 얘기들이 너무 좋았다. 공감하는 얘기들, 격려가 되는 얘기들도 많았고, 무엇보다 재미있었다. 하지만 예상대로 되지 않은 것도 있는데 미팅 마지막에 녹음 날짜를 잡고 있었던 나랄까. 두 시간이 좀 안되는 미팅을 하면서 주옥같은 말을 던지셨는데, 그 중에 결심을 하게 한 중요한 말이 두 개 있었다.
'4개월 실험한 사람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다는 것'과 '조금 다르게 사는 사람들도 나름의 일상이 있다는 걸 보여줘야 한다. 모두 같은 일상을 살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면 덜 불안하게 자신의 모습으로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말. N잡을 시작하면서 '누군가 N잡이 가능한지 실험 해야한다면 이 상황을 좀 덜 불안해하는 내가 해봐도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이 실험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나름의 일상으로 보일 수 있다면 떨리는 마음 같은 것은 좀 괜찮지 않나 싶었다. 그리고 특별한 기술이 중요하다기 보다는 4개월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나만 할 수 있는 얘기들, 그러니까 미숙함에서 오는 불안이라든지, 시작 전에는 상상하지 못한 경험들, 이것을 통해 생긴 질문들이 더 중요한 것이라는 말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재밌는 건 다 해보기로 했으니까, 재밌게 해보지 뭐. 이런 마음으로 녹음을 했고, 8월에 두 번으로 나뉘어 방송되었다. 첫 회에서 '안녕하세요 홍지납니다앙' 이렇게 인사를 하며 시작했는데 내 목소리를 듣는다는 것이 뭔가 부끄러워서 얼마간은 듣지 못했다.
디퍼 인터뷰 때도 그랬지만 <일상기술연구소> 녹음 역시 내게 수많은 질문을 던져주었고, 그 답을 생각하면서 지금 내 상태와 가고 있는 길을 점검할 수 있었다. 특히 내 대답을 제책임님과 금고문님이 다시 해석해주는 과정에서 새로 알게 되는 내 모습도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것. 인간은 누구나 정치적 존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내가 하는 일들이나 N잡이 이런 내 인간관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녹음을 하면서 디모스도, 빠띠도, N잡이나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도 '나다운 모습으로 살기 위한' 큰 범주의 나의 정치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나에게 '시간에 대한 주도권'이 중요한 이슈인 것은 알고 있었지만, N잡을 설명하는데 큰 비중을 차지할 수 있다는 것도.
두 시간 동안 진행된 녹음이 끝나고도 했던 대답과 새롭게 하고 싶은 대답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겸업의 기술'이라는 말은 이후에 디퍼살롱을 진행하거나 컨퍼런스 발표 준비를 할 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내 일을 어떤 기술로 정리해내면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생길 뿐 아니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도구가 되기도 했다. '기술'이라는 말 안에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요소들이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원잡을 하면서
가장 싫었던 순간은 언제였나요?
질문 중에 이런 것이 있었다. '직업을 하나만 가졌을 때 싫었던 것'. 사실 나는 직업을 하나만 가진 상황이 싫어서 N잡을 시작했다기 보다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걸 할 기회가 생겨서 시작한 거라서 딱히 생각나는 답이 없었다. 먼저 받은 질문지에 '없다'라고 쓰는데 퍼뜩 생각나는 순간들이 있었다.
"진아님, 조직 밖의 일을 할 에너지를 좀 더 조직 안에서 쓰면 사업이 더 크게 잘 될 것 같아요."
나는 N잡을 하기 전에도 프로젝트를 했고, 본격적으로 프로젝트를 하지 않더라도 꾸준히 뭔가 했다. 그런데 아주 가끔 '사이드 프로젝트'에 들일 에너지를 일에 들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내가 충분히 일하고 있고, 맡은 업무에 펑크가 나거나 한 것이 아닌데 이런 피드백을 받으면 황당해졌다. 오히려 내가 조직 안에서 힘이 달릴 때보다 성과가 좋을 때 주로 이런 피드백을 받았다. 어쩌면 지금도 이렇게 하고 있는데 힘을 더 주면 더 잘 되지 않을까 하는 아쉬운 마음에서 그냥 해 본 말일 수도 있지만, 이 말을 들으면 존재가 조직 내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힘이 빠졌다.
저는 제 에너지를 스스로 쓸 줄 아는
에너지 부유층이 되고 싶어요
뭐 저런 한마디에 존재를 운운하느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쓸 에너지를 내가 결정하는 사람이고 싶다. 회사에 쓸 에너지까지 다른 곳에 쓰고 있어 업무에 지장을 준다면 그건 일단 안될 일이고, 인사고과에 반영하거나 지장을 주고 있는 부분을 얘기해서 고치도록 하면 된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회사가 내 에너지를 컨트롤 하는 게 필요한 것일까. 아니, 그게 가능할까.
나는 내 에너지를 일하는데 뿐만 아니라 나답게 살 수 있는 삶의 영역을 만드는데도 쓰고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렇게 살기로 다짐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 에너지를 아까워하는 피드백에서 '다양한 일을 하며 삶을 꾸려가는 개인'으로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이건 특정한 한 조직에서만 경험한 것이 아니고 일을 하며 아주 가끔 들었던 말이다. 올 해 상반기에 이직을 할 때 함께 일하자고 제안을 했던 조직 중에서도 이런 입장을 보인 곳도 있다. 정리해보면 이런 입장들은 틀린 게 아니라 나와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 선택의 문제이고 조직이든 개인이든 각자의 상황에 따라 결정할 사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한 달 정도 이직을 위한 미팅을 하면서 이 조직이 '다양한 일을 하며 삶을 꾸려가는 구성원'과 함께 일해도 괜찮은 곳일까를 중점적으로 봤다. 조직도 나를 보지만 나도 조직을 봐야한다는 생각을 이때 한 것 같다. 내 상황과 가치관, 그리고 올 한 해 하고 싶은 일들을 구체적으로 얘기하고, 만나서 하는 미팅 뿐만 아니라 이를 조율하기 위한 이메일도 여러 번 주고 받았다. 그렇게 결정하게 된 곳이 지금 일하고 있는 진저티프로젝트와 빠띠이다. 물론, 내가 아니어도 각자의 방법으로 일하고 삶을 살아가는 구성원들이 이미 있는 조직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생각을 한다.
N잡이라는 건 결국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내가 갖는 일
팟캐스트 마지막에 '겸업의 기술'을 정리하면서 금정연님이 N잡은 결국 시간에 대한 주도권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라는 말을 했다. 나도 동의한다. 어디서, 얼만큼 일할지, 그리고 그 모양이 어떤 형태일지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사람이 N잡러이기 때문이다. 물론 조직의 한 구성원으로 조직의 맥락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일하기 때문에 조직과 함께 고민해야 한다. 하지만 선택과 책임에 있어서 나에게 더 많은 무게가 주어지는 것이 N잡러인 것 같다.
누군가 N잡을 하면 돈을 많이 번다, 했는데 나의 경우엔 그렇지 않다. 돈을 버는데 드는 시간(노동하는 시간)을 N으로 나눴고, 나눠진 만큼 월급도 나뉘기 때문이다. 하나의 일만 할 때와 다른 점은 이 과정에 내 의지나 생각이 더 많이 반영되었다는 것이다. 이게 내게 중요한 거니까. 내것을 내가 결정할 수 있는 가능성을 사면서 그에 따른 책임이나 불안, 바쁨 같은 것을 같이 샀다고 하면 적절한 설명이 될까.
그리고 이건 여러 개의 일을 하지 않는 사람들도 가질 수 있는 태도인 것 같다. 내 에너지, 내 시간, 내 능력을 동료들과 잘 조절해서 함께 목표를 이루어 가는데 능동적으로 쓰는 일. 그래서 어쩌면 N잡은 상태가 아니라 태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을 꼭 정리하고 싶었는데, 미루다 정리하고 나니 여름을 지나 가을로 가고 있다. 다행인 것은 오늘은 여름만큼 더웠고, 그래서 어쩌면 '여름이 다 가기 전에 여름의 일을 정리해 보았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혼자 우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