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망 좋은 집
[나 이번 주에 서울 ㄱㄱ!]
좀 추운 겨울에 광양에 사는 친구로부터 카톡이 왔다. 다가오는 일요일,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조승우가 나오는 뮤지컬을 볼 거라며 흥분해 있었다. 분명히 같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때는 연예인도, 좀 생겼다 하는 남자애들에도 일절 관심 없었던 친구였는데 나이 먹고 결혼을 해 애까지 낳고 나니 지금은 난리도 아니다.
“솔직히 조승우가 잘 생긴 건 아니지.”
광양에서 올라온 친구를 위해 선뜻 만남 장소로 본인의 집을 제공한 집주인 친구가 말했다. 광양 친구는 바로 잘생김의 기준까지 정의해가며 반격했고, 팔을 휘두르다 테이블 위에 있던 ‘딸기 막걸리’ 병을 넘어트릴 뻔했다. 다행히 안양에서부터 ‘딸기 막걸리’를 사간 내가 순발력 있게 잡아냈다. 이어서 집주인 친구가 너무 맛있다며 불쑥 잔을 내밀었고 그 빈 잔에 마지막 걸쭉한 한 잔을 따라냈다.
한 때, 우리 셋 모두 서울에 살았었지만 한동안은 그러지 못했다. 조승우를 사랑하는 친구는 신랑이 다니는 ‘포스코’ 때문에 광양으로 이사 갔고, 나는 연남동에 살다 폭등하는 집값과 진땀 나는 육아에 항복하고 부모님 댁이 있는 안양으로 이사 나왔다. 세상에, 회사가 양재동인데 같은 서울 안 연남동보다 서울 밖 안양 출퇴근이 훨씬 더 편하다. 또 한 친구는 회사 때문에 신촌에 살다가, 또 회사 때문에 송도로 이사 갔었다. 그게 엊그제 같았는데...
[나 평창동으로 이사 왔어.]
[뭐? 언제? 평창동?!!]
[얼마 전에 ㅋ 잘 됐다. 주말에 다 우리 집으로 와! 집들이하자!!! �]
신났다. 서울에 가서 삐댈 수 있는 친구네 집이 한 군데 더 생기다니. 그것도 평창동이다. 드라마에서 일해 주시는 이모님이 “사모님~ 전화받으세요~” 하는 평창동. 서울 한복판에 있지만 대중교통으로 다니기 힘든 동네!
“진정해, 진정해. 그 사모님들 댁 사이에 우리 집이 숨어 있는 거야.” 송도에서 평창동으로 이사 온 집주인 친구가 경복궁역에서 나를 태워가며 내 흥분을 가라앉혔다. 친구네 집에 거의 다다라서 GROUND62라는 럭셔리해 보이는 카페가 보일 때 즈음 물어봤다.
“그럼, 회사가 다시 신촌으로 이사 와서 여기로 온 거야?”
“아니. 그대로 송도에 있어. 나 송도로 매일 출퇴근해.”
“도랏! 안 힘들어?”
“응. 할 만 해.”
매일 송도로 출퇴근하는 것도 불사르게 만드는 평창동 집은 상상에서 보다 근사했다. 친구가 이모님은 당연히 안 계시고 동네엔 마을버스가 다니며 집은 송도에 살던 아파트보다 작고 마당은 거실보다 더 작다며 충분히 설명해 주었는데도 근사했다. 안양에서 온 나와 광양에서 온 친구는 테라스 밖, 작은 마당 울타리 너머로 보이는 풍경에 여러 번 “하!” 감탄사를 뱉었다. 고개를 내리면 산 아래 서울이 운치 있는 유럽 도시처럼 보였고, 고개를 들면 색 중에 ‘하늘색’은 세상 쓸모없는 색임을 증명해주는 하늘이 선명하게 보였다. 부러웠다.
“오빠 있으면 마당에 불도 피워 달라고 할 텐데.”
평창동 친구의 남편은 토요일을 맞이해 이제 막 5학년이 된 딸과 함께 데이트를 나갔다. 물론 우리끼리 편하게 즐기라는 그의 배려임을 우리는 잘 안다.
“오빠, 빨리 들어오라고 해. 오빠까지 있어야 떠드는 재미가 있지.”
“안 돼, 안 돼. 예린이가 있으면 나한테 너무 붙어 있어서 너네랑 놀 수가 없어.”
“아, 예린이도 보고 싶은데. 많이 컸지? 너무 예쁘더라.”
“무슨. 선우가 많이 컸지.”
“말도 마, 벌써 냄새나려고 해. 큰일 났어.”
“현수도 그래.”
우리 셋의 수다는 안 그러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애들 이야기로 넘어갔고 또 중구난방 전혀 다른 이야기로 이어진다. 서로 자기 회사에 있는 또라이가 더 이상하다며 겨뤘고 세상에 진짜 그런 개또라이가 있냐며 놀라기도 한다. 수다는 끝이 없다. 조승우에 흥분한 광양 친구가 빈 ‘딸기 막걸리병’을 제대로 넘어트렸다.
“힝… 너넨 좋겠다. 서울 살아서. 나는 조승우 한 번 보려면 여행을 해야 하는데 너네는 아니잖아.”
“나도 안양이잖아. 서울 나오는 거 완전 여행이야. 버스 타고 지하철 타고.”
“야 야, 서울 사는 거랑 조승우랑 무슨 상관이야. 나는 여기 살아도 뮤지컬 자체를 본 적이 없어.”
“그래도… 여긴 너무 좋다. 나 연남동 살 때 주말마다 로또 샀잖아. 제발 한 번만 돼서 서울에 있는 좋은 집 사게 해 달라고. 그때 됐으면 나도 이 근처 어디로 이사 왔을 거야, 분명히.”
“진짜? 그래서 뭐 됐어?”
“되기는 뭐가 돼. 천 원짜리 한 번 된 적이 없어.”
친구가 웃으며 와인 한 병을 들고 왔다. 광양 친구와 내가 와인 따는 건 아직도 어렵다며 코르크 따개로 고군분투할 동안 평창동 친구는 라면을 끓여준다며 부엌으로 갔다.
“야, 하지 마. 네가 끓이는 라면은 맛없잖아.”
“아, 왜? 나 이제 많이 늘었어. 오빠도 인정했다고.”
“냅둬 봐, 냅둬 봐. 그래, 한 번 또 속아준다.”
우리는 자지러지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오빠가 라면이 맛있어서 인정한 게 아니라 사회생활을 집에서도 한다고 입이 마르게 칭찬했다. 몇몇 변한 게 있으면서도 셋이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로 깔깔거리는 건 변함이 없다.
“아무튼 조승우 덕에 얼굴 봤다. 고마워해야겠네.”
또 웃는다.
헤어질 시간이 됐다. 광양 친구가 동대문 사는 동생 집으로 가기 위해 부른 택시가 먼저 와서 갔고 내가 부른 택시만 오면 된다. 기다리면서 멀찍이 GROUND62가 보이길래 평창동 친구에게 물어봤다.
“그럼 너는 주말엔 저 카페 가서 브런치 먹으면서 즐기는 거야? 분위기 있게?”
“뭐라는 거야? 저기 비싸서 못 가. 다들 요 밑에 스벅 가.”
“아, 진짜? 크크크, 다 똑같네.”
좀 추웠던 겨울바람이 더 세졌다. 그러나 움츠려 들지 않았다.
“어, 저기 택시 왔다.”
“야, 다음에 올 때도 딸기 막걸리 사 와야 해.”
“크크, 응.”
전망보다 더 좋은 게 나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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