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브리드 명절이야기

편리함과 단출함, 그 씁쓸함에 대하여...

by 피터팬신드롬

한 해 두 번 있는 명절, 그 풍속도가 많이 변했다. 명절 차례를 지내려 귀성길에 올랐다는 사람들 소식은 옛날에 비하면 가뭄에 콩 나듯 한다. '친척', '귀성', '고향'이라는 단어보다는 '여행'이라는 단어가 더 많이 등장한다.

내 경우도 그렇다. 2020년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친지들과 왕래는 거의 끊기다시피 했다. 현충일에 헌인릉 앞에서 제법 크게 했었던 경주 최 씨 행사에는 5년째 이 핑계 저 핑계로 안 나가고 있다. 일일이 기억도 나지 않는 먼 친척들의 반가운 인사들이 부담스럽기만 했었던 것도 있지만, 돌아가신 지 6년이 지났음에도 그런 자리에서 아버지를 추억한다는 게 영 자신이 없다, 아직은...

이유가 어쨌든 듣자 하니 나만 모이는 데에 힘쓰지 않는 것은 아닌가 보다. 이제는 최 씨 모임을 야외 행사에서 이제는 조촐하게 식당에서 한다고 했다.


차례 지내는 것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는 그만뒀다. 살아생전 당신이 세상을 떠나면 차례나 제사를 지내지 말라 하셨었다. 왜 그러셨는지는 모르겠다. 하라고 하셨더래도 할 수 있었을까 싶은데, 이젠 명절이 되면 겨우 어머니, 남동생과 납골당에서 아버지 뵙고, 식사 정도하고는 헤어지곤 했다.


아버지 살아생전, 해마다 4번의 차례와 제사를 지냈었다. 아버지의 무소불위의 명령이었기에 따를 수 밖에 없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을 두고 아버지는 건전 가정의례 준칙(?)에 따라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조율이시, 두동미서 등을 지켜, 과일, 생선, 고기, 생선의 머리 방향, 밥과 국, 포와 식혜의 좌표(?)를 지켜 간소하지만 정성스럽게 차례와 제사를 빼먹지 않으셨었다. 4명이나 되는 아버지의 여동생들, 나에게는 고모들, 어머니께는 편하지만은 않은 시누이 식구들이 지방에서 올라와 서울에서 모이면, 오랜만에 내가 아는 평균 레벨에서 2~3 피치 위로 하이톤의 깅상도(?) 목소리가 집안을 가득히 채웠었고, 어머니는 음식 장만하시느라 파김치가 되셨던 게 기억이 난다. 삶은 돌문어와 차례상 음식으로 맛보는 남해 식 비빔밥은 참 맛있었는데 어머니가 고생하는 게 싫어서 행복하기만 한 명절 같지는 않았었다. 왜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었고….

돌이켜보면 아버지께서 챙기시던 설날, 한가위의 차례는 사실은 하이브리드 방식이었었다. 향을 피우고 찬송가를 부르는 기이한 풍경이 펼쳐지고는 했었는데, 교회 권사이신 어머니와 같은 교회에서 왜 나는 집사냐며 불평하시던 나이롱(?) 신자 아버지와의 기막힌 타협의 결과였던 것. 추도예배라지만, 할아버지 할머니 영정사진 앞에서 어머니가 대표 기도를 하고, 제삿밥에 수저를 꼽고 숭늉을 챙겨드리는 순서가 진행되면서도, ‘하나님의 나팔 소리 천지 진동할 때…’ 찬송가를 함께 불렀고, 차례가 끝날 때쯤에는 눈물지으며 ‘어머님 은혜’를 부르고는 마무리가 되는 식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항상 고모들이 먼저 키득키득 웃고는 하셨지만, 마지막에는 모두 눈물 꼭지를 틀어 놓으셨더랬다. 그때에는 이 괴이한 이단(異端)의 행사가 언제까지 이어질까 궁금했었고, 속으로 감히 비웃기까지 했던 것 같지만, 지금은 많이 후회한다.

그 순간들을 돌이킬 수 있다면 아버지 곁에서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 가령 요즈음의 AI 기술로 할아버지 할머니 사진을 영상으로 만들어 틀어놓는다거나….) 차례에 열정적으로 참여했을 텐데….


아버지의 고향 남해 선산에는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 묘소 밖에는 없고, 할아버지 형제분들 묘는 모두 이장되어 납골당에 모시어졌다. 최 씨 문중 어르신네들께서는 얼른 이장을 하라고 요즈음도 어머니를 통해서 말씀하셨었다고 전하셨다. 아버지 생가는 관리할 사람이 없어 몇 년째 흉가처럼 남아있는 것을 보면 차라리 모두 정리해야 하는 건가 싶다가도, 그러지 못하고 있다.

내 어릴 적 ‘국민학교’ 시절 방학 때가 되면 여름이고 겨울이고 시골이라는 곳이 있어서 멱감고, 썰매 타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럴 수가 없다. 서울 태생이라 생각했던 나 자신도, 이제는 아버지의 고향은 나의 고향인 것을 마음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강남에서 노가리나 씹으면서 맥주나 한잔할까 싶다가도 내일부터 시작되는 설날 연휴, 아내와 아들과 여수를 내려가기로 했기에 일찍 집에 왔다. 납골당에는 지난주에 가서 어머니와 동생을 보고 저녁 식사를 했으니 마음은 편하다.

10여 년 전 회사에서는 명절 선물로 배 상자를 보자기에 싸서 직원마다 나눠줬었는데, 힘들게 보자기를 풀어서 상자를 열어봤더니 웬 ‘돌배’만 가득해서 실망하고 버렸던 기억이 난다. 한번 베어 물었었는데 이가 부러질 뻔했기 때문이었다. 그것에 비하면 깔끔하게 봉투에 담긴 백화점 상품권을 명절 선물로 지급한 지금 회사의 센스에는 아낌없이 박수를 주고는 싶지만….


왠지 씁쓸하다. 이 시대의 단출함이, 편리함이.


고생스럽고, 복잡 시럽고, 시끄럽고, 낄낄거리고, 바다 냄새와 섞여 비릿한 탄내가 그윽한 밥짓는 냄새가 나던 그 때가, 아버지와 그때 그 시절, 우리 가족을 추억한다.


예전에 쓴 글이지만, ‘남해’라는 시로 '시골'을 떠올려보면서...


새해 복 많이 받으시길.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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