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을 보며

색연필 그림일기

by Eli

컴퓨터 작업을 하다가 내 손을 보게 되었다.

햇살에 환히 드러난 손.

너무나 낯선 내 손.

내 몸의 지체인데 내 것이 아닌 생경한 느낌.


내 손은 예쁜 손이 아니다. 크고 손가락도 굵고 길다. 피부는 흰 편이고 크기에 비해 마디가 굵거나 한 것은 아니어서 예쁜 손은 아니어도 나름 봐줄 만하다 스스로 여겼다. 주변 사람들은 내 손을 보고 부잣집 맏며느리 손이라고 품평들을 하곤 했다. 어머니를 닮아 손재주가 많은 손. 내 손은 그런 손이라고들 했다.


그런 내 손이 햇살 아래 민낯을 그대로 드러냈다( 작업실로 쓰는 방은 햇살이 지나치게 잘 들어온다). 특히 그동안 별 신경을 쓰지 않았던 피부의 주름살이 적나라하게 보인다. 원래 이렇게 주름이 많았던가. 주름의 결결이 일정한 선을 만들고 있다. 들여다보니 무수히 많은 선들이 있다. 그 선들은 서로 만나고 지나치면서 마름모나 세모, 네모 등의 작은 모양을 이루고 있다. 손을 죽 펴니 주름이 한 데 뭉치면서 군데군데 파인다. 피부를 잡아 늘여본다. 물기 없이 메마른 느낌. 젊은 아들의 손을 훔쳐보니 단단하고 남자다워 보이는 힘줄과 핏줄은 보이나 주름살은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도대체 누구의 손이란 말인가.


손을 그리는 것은 여전히 어렵다

이 손으로 많은 일을 했다. 지금까지 나와 가족을 위해 일했고 부모님께 솜씨를 물려받았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텃밭 일을 할 때는 손으로 흙을 만지는 일이 좋아 일부러 장갑을 끼지 않기도 했다.

하지만 오늘처럼 늙어버린 손을 만나는 것은 당혹스럽다. 마치 내 안의 진액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것을 목격한 느낌이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시간은 거꾸로 흐른다"란 영화가 기억난다. 벤자민(브래드 피트)은 어느 날 중년의 나이가 된 옛 연인에게 나타나는데 그의 모습은 너무나 젊은 모습이다. 그리고 더 젊어지면서 여자는 할머니가 되었고 벤자민은 아기가 되었다가... 사라진다. 점점 젊어지다 못해 어려지고 마지막엔 아기가 되어 사랑했던 옛 연인의 품 안에서 벤자민은 소멸한다. 아장아장 걷는 벤자민의 손을 잡고 정원을 걷는 등 굽은 할머니가 된 여자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영화. 영화에서 벤자민은 10대가 되면서 치매가 나타나고 결국 언어도 기억도 잃는다.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서클(circle)'이란 단어가 생각났었다. 삶이란 순환이다. 젊은 아들의 손과 내 손도 '순환'의 의미 안에 있다. 벤자민의 시간이 거꾸로 간 것은 삶의 순환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이 아닐까. 나의 삶은 끝을 향해 가고 있지만 아들의 삶은 정점을 향해 가고 있다. 아들과 아들의 아들은 또 그렇게 반복되고 끝없이 이어지는 삶 안에서 각자의 '손'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동안 나이를 먹는다거나 늙는다는 것에 대해 나는 무신경했다. 체중은 신경 썼으나 내 몸에 대해선 무심했다. 몸이 늙는다는 것은 겸손해져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뜻이다. 햇살에 가감 없이 드러난 내 손을 보고 있자니 마른 풀냄새가 난다. 오늘따라 쓸데없이 햇살이 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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