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딱 8년 전 이맘때인 2013년 10월에 발행된이 기사는 '에코세대'라는 1979~1992년 출생한 세대의 특징을 설명하고 있다. 나는 MZ세대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에코세대였다니...
내가 에코세대였다는 사실에 크게 실망했지만, 그래도 기사 내용이 흥미로워 쭉 읽다가 놀라운 대목을 발견했다.
"… 에코세대는 부동산보다 금융자산을 통한 자산 축적 가능성을 상대적으로 높게 평가하고 있다. 내 집 소유도 좋지만 쾌적하다면 전·월세도 괜찮다는 거주 중심의 주거관을 갖고 있다.에코세대 중‘반드시 내 집을 소유해야 한다’는 의견은52.7%. ‘내 집 마련을 위해 고생하기보다 쾌적하면 전·월세도 괜찮다’는 의견 역시 44.4%에 달했다."
쾌적하면 전·월세도 괜찮다는 의견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니? 이게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란 말인가!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아니 내가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단 말인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확실히 2010년대 초반에는 지금 같이 2030 세대가 내 집 마련에 목매는 분위기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한다.
FIRE족, 영끌족보다는욜로족(YOLO)*이 대세였던 시기가 있었다. (*욜로족 : 미래 또는 타인을 위해 희생하지 않고 현재의 행복을 위해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
우리나라에서 "한국의 2030 세대, 내 집 마련 충분히 가능하지만 굳이 연연 안 해…"라는 제목의 기사를 다시 보게 될 날이 올까?
흠.. 잘 모르겠다.
그럼 일본의 MZ 세대들은 어떨까?
일본은 월세가 한국보다 훨씬 비싸니까 당연히 내 집 마련 욕구가 한국 MZ세대보다 강할까?
(참고로 도쿄 기준 10평 미만의 원룸 평균 월세는 100만 원대, 10평대는 200만 원대, 20평대는 300만 원대에 육박한다.)
#1. 내 집 마련에 시큰둥한 일본의 MZ세대들
일본 주재원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술자리를 가장한'교묘한' 취중진담 취재를 통해
주변 일본 친구들에게 앞으로 주택을 구입할 계획이 있는지 물어보았다.
참고로 내 친구들은 이제 사회생활 7년 차에 접어든 직장인들이다. 친구들이 다니는 회사는 회계 컨설팅 펌, 무역상사,제조회사, 석유회사, 외국계 IT기업, 벤처기업 등 다양하다. 대부분 대기업에 다니고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일본 직장인보다는 연봉 수준이 높은 편이다.
인터뷰 결과, 언젠간 집을 사겠다는 생각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지만, 지금 당장 집을 마련할 계획이 있다고 답변한 친구는 한 명도 없었다.
부동산과 주식 같은 재테크에 열중하기보단 평일에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주말이 되면 골프나 서핑 등 본인이 좋아하는 취미생활을 만끽한다.
다들 집에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앞서 기사에 다뤘던 2010년대 초반 한국의 에코세대를 보는 느낌이다.
지난 포스팅에서 일본 수도권의 주택 시장을 알아봤지만,일본 청년들이 수도권에서 집을 사는 게 절대 쉬운 일은 아니어도
'이번 생에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다.
일본 정부와 은행에서도 자국민들에게 집을 사라고 팍팍 밀어주고 있다.
그런데도 일본 2030들은 내 집 마련에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술을 한 잔 더 들이켜고,
용기를 내어 좀 더 날카로운 질문을 던졌다.
"너네들은 맘만 먹으면 집을 살 수 있으면서 왜 내 집 마련에 관심이 없는 거냐?"
#2. 일본의 MZ세대가 내 집 마련을 서두르지 않는 3가지 이유
1. 버블 붕괴의 기억
첫 번째 이유는, 부동산 버블 붕괴의 기억 때문이다.
일본 친구에게 한국은 요즘 집값이 너무 비싸서 내 집 마련할 엄두가 안 난다고 푸념 비슷하게 말했더니, 그 친구는 이렇게 답했다.
"한국 사람들은 버블을 경험한 적이 없으니까 그럴 수도 있겠네."
우리에게 'IMF 외환위기'라는 뼈아픈 기억이 있다면, 일본에게는 '부동산 버블 붕괴'라는 뼈아픈 기억이 있다.
출처: 일본 국토교통성 <2020년 지가 공시>
지금으로부터 37년 전인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화의 가치가 치솟자 수출로 승승장구하던 일본 기업들이 큰 타격을 받았다. 일본 정부는 내수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금리를 연 5%에서 2.5%로 인하했다. 금리 하락으로 시장에 풀린 돈은 주식이나 부동산으로 몰려들기 시작했고, 자산 가격이 크게 상승했다. 금융기관에서는 높아진 땅값을 담보로 부동산 담보 대출을 폭발적으로 늘렸다. 1990년 일본의 부동산 가격은 5년 전인 1985년에 비해 전국 평균 5배나 올랐고, 특히 도쿄, 오사카, 나고야 3대 지역의 주택지 가격은 무려 11배나 상승했다. 그러나 과도한 투자는 버블로 이어졌고, 90년대 초반 버블 붕괴로 땅값과 주가가 완전히 곤두박이칠 쳤다.
1990년대 후반 IMF 위기를 겪은 부모님 세대를 보고 자란 한국의 2030 세대는 대기업 정규직이나 공무원과 같이 잘릴 걱정 없는 '안정적인' 직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하다.
마찬가지로 1990년대 초반 부동산 버블 붕괴를 겪은 부모님 세대를 보고 자란 일본의 2030 세대는 부동산에 섣불리 투자하지 않는다. 왜냐면 집값이 아무리 올라도 언젠가는 떨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버블 붕괴는 그들의 기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 잡고 있다.
2. 집은 '감가상각'되는 자산
두 번째로, 일본 사람들은 주택의 가치가 시간이 지날수록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오래된 집이라도 입지가 좋으면 집값이 오히려 상승하는 경우가 많지만, 일본은 주택의 건축 연수가 오래되면 부동산 가격이 낮아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례로 도쿄의 구축 아파트 평균 가격은 4,000만 엔(약 4억 2천만 원) 정도로신축 아파트 가격의 절반 정도다.
일본에서는 아무리 신축 아파트라고 해도 입주해서 단 1초라도 살았으면 되팔 때는 바로 구축 아파트 취급을 받는다. 신축과 거의 다름 없어도 하루라도 살았으면 중고 취급을 받기 때문에, 시장에 되팔 때는 처음 샀을 때보다 10~15% 떨어진 가격에 거래하게 된다.
출처: https://www.reds.co.jp/real/p70423/
일본의 아파트는 지어진 순간부터 감가상각이 시작돼 준공 30년까지 꾸준히 하락한다. 특히 준공 25~30년 사이에 가격 하락폭이 가장 크다. 30년이 넘으면 하락이 멈추고 플러스로 전환되는데, 그 이유는 재개발, 재건축 등에 대한 기대 심리 때문이다.
이렇듯 주택이 '감가상각'이 발생하는 자산으로 인식되다 보니 일본 사람들이 집을 살 때는 얼마나 더 비싸게 되팔 수 있을지가 아닌, 얼마나 가치 하락을 막을 수 있을지를 더 걱정한다.
아파트 감가상각에 대비하는 요령에 대한 포스팅 (출처: https://grand-next.jp/journal/2021/09/10/263.html)
물론 일본도 2012년 아베노믹스 이후 도쿄를 중심으로 수도권의 아파트 가격이 꾸준히 우상향해왔다. 실제로 2020년 도쿄 23구의 신축 아파트 가격은 7,564만 엔(약 7억 9,400만 원)으로 2014년 대비 약 25.4% 증가했다. 하지만 상승률이 6년 전 대비 20%대 수준이기 때문에 보유세, 거래세 등 기타 비용을 고려하면 주택 매매 차익으로 큰 수익을 볼 정도는 아니다.
애초에 부동산 가격이 한국처럼 드라마틱하게 상승하지도 않는 데다, 전세제도가 없어 갭 투기도 불가능하므로, 부동산 매매 차익으로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
3. 까다로운 대출 조건과 대출금 상환의 부담
세 번째 이유는, 주택 자금 대출을 받기 위한 조건이 까다로우며, 대출에 성공해도 그때부터 평생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아빠 가슴에 대못 박는 짱구 (출처: 짱구는 못 말려)
일본의 주택 대출 금리는 변동금리 기준 0.5%대로 말도 안 될 정도로 저렴하다. 다만, 그만큼 아무나 빌려주진 않는다. 대출 심사 시 신청자의 직업, 나이, 연간 소득, 근속연수 등을 종합적으로 따진다. 안정적인 직장에 다닐수록, 나이가 어릴수록, 연간 소득이 높을수록, 근속연수가 길수록 좋다. 따라서 스타트업이나 중소기업에 다니는 직장인들, 이직 경험이 많은 직장인들, 사업가들, 자영업자들은 대출 심사에서 통과되기 어려우며, 운 좋게 통과된다 해도 대기업 직장인이나 공무원보다 높은 금리를 적용받는다.
대출 심사에 통과된 다음도 문제다.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구입한 후에도 짱구 아빠처럼 30년 넘게 계속 빚을 갚아 나가야 하므로 심리적 부담이 크다. 특히 일본 주택은 기본적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에, 높은 가격에 되팔기도 어렵다. 대출금을 꾸준히 갚아 나가려면 안정적인 직장에서 '존버'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선택지가 된다. 다니는 직장이 아무리 거지 같아도 이직했을 때 연봉 하락의 리스크를 감안하면 계속 다닐 수밖에 없다. 은행한테 빌린 주택 대출금 때문에 자유로운 삶이 저당 잡히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평범한 직장인이 집을 살 때는 직장과 이동의 자유를 저당 잡힐 각오를 해야 하다 보니집을 사는 것에 매우 신중한 편이다.
#3. 일본 사람들은 평생 내 집 마련을 하지 않는 걸까?
그럼 일본 사람들은 평생 내 집 마련을 하지 않고 임대 주택에 사는 걸까?
그건 아니다. 일본 사람들도 때가 되면 집을 산다.
그럼 일본 사람들은 언제 집을 사는 걸까?
일본 국토교통성의《2019년 주택시장 동향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처음으로 주택을 구입한 일본인의 평균 연령은 30대 후반~40대 후반이다. 30대 미만의 주택 구입비율은10% 미만이다.(신축 단독 주택을 제외)
정리하면, 일본 청년들은 20대~30대 초반까지는 내 집 마련에 크게 연연하진 않지만, 연봉이 올라가는 30대 중후반에 접어들면서주택을 구입한다. (참고로 일반적인 일본 회사에 다니는 샐러리맨의 연봉은 퇴직할 때까지 계속 우상향해서 30~34년 차에 약 7,500만 원 정도로 정점을 찍는다.)
무리한 '영끌'로 내 집 마련을 서두르지 않을 뿐, 일본 사람들도 때가 되면 집을 사긴 산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 일본에서는 집을 투자 목적이 아닌 거주 목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많다.
일본 사람들은 결혼, 출산, 정년퇴직 등 인생에서 큰 변화가 생기는 시기에 주택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집을 살 때도 가격 상승에 대한 기대보다는 살기 편한 곳, 주변 환경이 좋은 곳, 평생 살아도 되는 곳을 고르는 경향이 있다.
#4. 결론
지금까지 살펴본 '일본의 MZ세대가 내 집 마련을 서두르지 않는 3가지 이유'를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버블 붕괴의 기억
첫 번째 이유는, 뼈아픈 부동산 버블 붕괴의 기억 때문이다.
2. 집은 '감가상각'되는 자산
두 번째로, 일본 사람들은 주택에는 감가상각이 발생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까다로운 대출 조건과 대출금 상환의 부담
세 번째 이유는, 주택 자금 대출을 받기 위한 조건이 까다로우며,
대출에 성공해도 그때부터 평생 빚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일본의 부동산 시장은 한국과 다른 점도 많지만,
인구 구조나 수도권 집중 현상 등 비슷한 측면도 많으니일본의 사례가 조금이나마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