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록]
그가 생각날 때마다 블로그에 치유록이라는 이름으로 그와의 추억을 써내려 갔다.
가슴에 담은 답답한 이야기들을 글로 쏟아 붓고 나면 그나마 조금 위안이 됐다.
그를 추억하면서 글을 쓰기 시작한지도 어느새 91일. 그동안 아흔 번의 굳은(정말 굳었었는지 나로서는 알 수 없으나)다짐들이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린 순간이 있었고, 흔들리다 못해 고꾸라진듯한 최악의 상황도 있었다. 하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여전히 잠이 오지 않는 새벽엔 그가 생각난다는 사실이다.
[기억]
문득 로만 침대 생각이 난다. 그와 사이즈가 딱 맞던 그의 영국 홈스테이 집 침대.
뭐든 잘 잊어버리지만 그와 관련된 것들은 어쩌면 이렇게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을까?
그의 홈스테이 레이디 이름도 생각난다. 트레이시. 그의 집 앞에 앉아 책을 읽으며 그를 기다렸던 유난히 햇빛이따사로운 그날 아침도 아직 생생하게 기억난다. 그날 학교까지 우리를 바래다 주었던 트레이시가 입은 치마와 셔츠까지도 기억이 난다. 비를 피해 나무 아래서 마셨던 맥주, 그리고 바게트와 짧은 입맞춤. 유난히 천장이 높아 마음에 들었던 구엘의 집 바로 옆 펜션 그리고 바르셀로나. 햇살이 무지 따사롭던 날 우리는 종종 공원에 앉아 낮술을 마셨었다.
그 몽롱하고 기분 좋은 날의 느낌들.
이젠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리운 날들의 기억.
[그의 방명록에 처음으로 등장한 낯선 여자의 이름]
얼굴이 갑자기 달아오르고 심장 박동이 빨라진다.
아직도 나는 단단히 착각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제 나는 더 이상 그의 여자친구가 아니다.
그런데 왜 그의 미니홈피에 등장한 낯선 여자의 이름 때문에 이토록 흥분하고 있는 걸까.
문자를 보내볼까, 전화를 걸어볼까 한참을 전전긍긍하다가 이미 끝난 인연이며 이미 내 사람이 아닌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진정시켜본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제니퍼의 무엇이 아니다.
그런데 그 낯선 그 여자는 왜 글 말미에 하트를 그려 넣은 걸까, 도대체 왜….
[날씨가 맑은 날]
분명히 한참을 연락하지 않고 지낸 거 같았는데 생각해보니 고작 3일이 지났다.
아직도 밖은 환한데 퇴근을 했다. 날이 맑아서 괜히 눈물이 났다.
일찍 끝났다는 핑계로 저녁이나 먹자며 찾아갈 애인이 없어서 서러웠나보다.
그런 내 기분을 눈치라도 챈 듯 때마침 DG에게서 연락이 왔다.
만나 온 시간 대비 나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녀석. 종종 그는 나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럴 땐 내쪽에서 한 발짝 물러서게 되지만 그래도 녀석은 내가 좋아하는 남자 사람친구 중 하나다(남자 사람친구라고 해봤자 눈먼곰과 DG, H 셋이 다지만). 얼큰하게 술기운이 오르자 녀석은 그의 이야기를 꺼냈고 우리 곁에 본인이 있었다면 우리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거라고 했다.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아직도 그런 류의 이야기는 나를 맥없이 슬프게 만든다.
그래서 또 말없이 술을 들이켰다. 한 잔, 두 잔. 술 한 잔이 한 병이 되고 두 병이 세 병이 되고, 2차로 끝내기로 한 술자리가 3차로 이어졌다. 술이 취할 때면 왜 더 그의 생각이 간절한 걸까? 그런데 정말 DG 말처럼 그가 우리 곁에 있었다면 우리가 이별하는 일은 없었을까?
<연애시대>의 시즈카와 가이에다 같은 멋진 친구들이 우리에게도 있었다면 리이치로와 하루양처럼 멀고 먼 길을 돌아서라도 결국, 다시 함께 할 수 있을까?
리이치로처럼 결혼을 하고 난 후에야 비로소 그는 내가 그의 인연이었음을 깨닫게 될까?
헤어지고 나서도 여전히 서로가 그리울까? 내 대답은 알겠는데 그의 대답은 모르겠다.
[헤어짐의 속도]
K의 미니홈피에서 그의 사진을 봤다.
언젠가 내게 찍어주었던 사진이다.
아마도 성시기 생일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K 옆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이 유난히 멋져 보여 카메라에 담아 놓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한 짓에 대해 점점 더 화가 난다. 그까짓 마음 이길 수 있다고, 충분히 이겨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더 아프다. 천천히 헤어 지자고, 조금 더 자랄 사랑이니 조금 더 키워보자고 했던 그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천천히 하루 종일 그리웠던 맘 반나절로 줄이고, 그와의 전화 통화도 조금씩 줄여가며 그렇게 보내도 힘들었을텐데…
어쩌자고 이렇게 힘든 결정을 혼자서 마음대로 해버린 걸까?
그와는 아무런 상의도 없이.
[벌써 1년]
매년 5월 5일은 영국의 ‘뱅크 홀리데이’다.
휴일을 즐기고자 우리도 브라이튼행 기차표를 예매했다.
햇살 아래서 키스도 나눴다. 둘만의 여행을 계획했지만 못난이 녀석들이 따라붙는 바람에 결국 단체여행이 되고 말았던 우리들의 첫 여행. 이미 해변가 팬션은 NO Vacance!!
남자 넷에 여자 둘이 묵을 수 있는 룸도 NO more!!
힘들게 찾아낸 펜션에서 우리는 동이 틀 때까지 게임을 했고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나눴었다.
녀석들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꿋꿋히 뽀뽀를 하고, 또 싸움을 했다. 6명 모두의 노력 끝에 얻어낸 인형 ‘고진감래’ 까지 나는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날로부터 오늘은 정확히 1년째 되는 날이다. 그날의 모든 기억이 이처럼 생생한데 그는 더 이상 내 곁에 없다.
[궁금한 몇 가지 것들]
야구장은 잘 다녀갔는지
혹시라도 종합운동장까지 왔었는데 혹시라도 내 생각이 나지는 않았는지
사진상으로 보이는 셔츠가 아주 잘 어울리던데 새로 샀는지
지난달 언젠가 민에게 전화를 걸었다는데 내가 그리웠는지 그냥 단순히 영국생활이 그리웠던건지
가끔 나는 영국에서 오로지 너 하나 바라봤던 것을 후회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사귀지 못한 것 안타까워하는데 혹시 너도 그러는지, 그래서 내가 원망스러운지
만나는 사람이 있다는 내 말을 정말 믿는 건지.
가끔 너도 아직 내 미니홈피에 기웃거리는지
혹시라도 한번쯤 핸드폰에 내 번호를 입력했다가 이내 지운 적이 있는지
이제는 내가 너의 지나간 연인들 중 하나처럼 아무 의미없어졌는지
니 마음을 흔들어 놓는 다른 사람이 생긴건지
이제 정말 우리는 볼 수 없는 건지....
[그가 오고 있다]
헤어진 연인으로부터 가장 듣고 싶은 말은 다시 시작하자는 말도 아니요, 진정 사랑했다는 말도 아니다.
‘내가 그쪽으로 갈께’라는 말이다.
그리움 참지 못하고 상대방이 있는 곳으로 가겠다는 말.
그 말 외에 다른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한달 하고도 10일이 조금 지난 시간, 그가 내게로 오고 있다.
[새벽, 다시 키노극장 앞에서]
조용한 새벽, 알 수 없는 어떤 힘에 이끌려 나는 억지로 눈을 뜨고 전화기를 확인했다.
2개의 메시지가 와 있었다.
수신인은 모두 그다.
키노극장 앞. 그는 우리의 마지막 만남을 3월 언젠가로 기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정확히 한달 하고도 열 하루가 지난 시간 그는 나를 찾아왔다.
헤어진 후 한달에 한번씩은 만나고 있는 우리.
어떤 날은 보자마자 달려가 안기기도 했고 또 어떤 날은 서먹하게 손도 잡지 않고 헤어지기도 했다. 어제는 집 앞 바에 마주앉아 그간 궁금했던 서로의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기네스를 고르는듯하더니 이내 레페브라운을 가리키며 물었다.
“백스로 할래, 레페브라운으로 할래?”
레페브라운은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했던 벨기에 여행에서 처음 마셔본 맥주다.
본머스로 돌아왔을 때 내가 그를 추억하며 마시던 맥주이기도 하다.
나는 당연히 레페를 주문했다. 그도 같은 걸로 주문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변한 것 없어 보이는 그와 겉으로는 무척 많이 변한 같으나 실상은 여전히 미련할 정도로 그대로인 나. 굳이 따지자면 우리의 연애를 컨트롤 했던 것은 언제나 그였다. 그는 나보다 현명했으며 인내심이 강했고 무엇보다 진중했다. 나처럼 화난다고 아무 말이나 막 해버리며 심지어 이별을 고하는 어리석은 짓 따윈 않는 사람이다.
축제가 끝나면 자신의 마음도 정리될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고,
이틀 전 내 전화에 축제 뒷 마무리를 모두 후배에게 맡기고 내 전화를 받았다고,
전화를 받고 무척 반가웠다고, 하지만 차마 먼저 전화를 할 수는 없었다고,
이런 류의 반가운 전화나 문자를 받아본 것이 고등학교 때 이후 처음이라고,
학교에서 맺는 허무한 인간 관계로 마음이 허하다고,
결국 장학금을 받았다고,
영어는 100명 중에서 2등을 했다고,
종합운동장에 친구들과 야구를 보러 왔었다고,
기아팬이니 기아가 온다면 함께 야구를 보러가자고,
나를 만나러 오기 전 선배가 양주와 맥주 그리고 장어를 사주어서 먹고 왔다고,
중간고사 이전에 너무 많은 예습과 복습으로 정작 시험기간에는 자만하여 성적이 그리 좋지 않아 걱정이라고 ...
그는 그의 한달간 근황을 전했다.
나는 그가 했던 모든 이야기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모두 다 기억하려고 되뇌이고 또 되뇌였다.
Text
나: 요즘 무슨 일 있어?
그: 요즘 뒤숭숭해서. 다음에 종로에서 맛있는 밥 살께요
나: 왜 뒤숭숭한지 물어봐도 돼?
그: 학교에서도 사람 많이 만나는데 인간관계가 좀 허전하고 허무해서 그런가봐 괜찮아지겠지.
나: 서로 좋은 사람 생겨도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면 니 허전한 자리 채워주며 친구해주고 싶어
그: 나도 같은 마음이야, 고마워요
나: 연인으로 더는 인연이 아니라면 나 너에게 엄마같은 친구로 있어주고 싶어 아들해, 내 아들.
그: 싫어 니가 내 딸해.
나: 알았어 잘자 아빠
그: ㅋㅋㅋ 웃었어 방금 굿나잇
[기억은 기록에 기인한다]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우리가 처음으로 함께 떠난 여행지에서도 나는 그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했다.
우리가 헤어지고 나서도 그 버릇은 여전하다.
그에게 편지를 보내고 싶을 때마다 그리고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 때마다 나는 블로그에 글을 썼다.
내가 알았던 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가 알아갈 그에 대한 이야기가 조금씩 쌓여갈 때마다 가끔은 이런 내 비밀스런 이야기를(내 진심) 그가 알아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 한참을 지나 이제는 조금 담담해진 마음으로 나를 보여줄 수 있어서인 것 같다.
글 속의 너구리(그가 붙여준 나의 별명이다)는 여전히 이성적이지도 냉정하지 못한 덜 자란 어른 같겠지만, 현실 속의 '나'는 '그'로 인해 조금은 자란 듯한 느낌이다.
며칠 전 잠실에서 함께 점심을 먹으며 그가 말했었다.
"한 사람을 다 알아가지 못했다고 해도 둘이 함께 한 그 순간까지 보여진 모습이 그 사람의 모습일거야"
그 말이 오랫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그는 잔인한 영화를 볼 때면 손으로 가만히 나의 눈을 가려줄 줄 아는 사랑스런 남자친구였고, 나이는 나보다 두 살 어렸지만 어른스러웠으며, 로맨틱한 센스를 가진 아주 잘생기고 반듯한 열혈청년이었다.
그의 기억 속에 나는 어떻게 정립돼 있을까?
[비가오는 허버트 애버뉴]
고작 몇 개월을 머물렀을 뿐인데 그곳에서의 기억은 너무도 선명하게 뇌리에 남아 있다.
오늘처럼 비가 오는 날에는 더욱 더 그곳이 그립다.
비가 오는 종로
비가오는 해버트 애버뉴...
그안엔 늘 그가 있다.
회색 후드티를 눌러쓰고 비를 맞으며 자전거를 타고 학교에 가는 그의 모습이 아른거린다.
[향기에 대한 기억]
불가리의 첫 오리엔탈 향수 옴니아의 서브라인 옴니아 크리스탈린.
내가 즐겨쓰는 향수를 헤어진 후에도 그가 기억해준다는 것. 왠지 기분좋은 일이다.
그를 만나는 동안 언제나 늘 불가리를 썼다.
그가 기억하기 쉽도록 한가지 향수만 고집한 까닭에서다.
향기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우리 사랑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어야 했는데…
[죽마고우]
언니랑 심하게 다투고 난 다음날, 집에 죽기보다 들어가기 싫은 날 그래도 다행인건 내겐 둘도없는 죽마고우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고 언제나처럼 그녀는 절대환영 피켓을 들고 나를 기다려주었다. 한때 그녀가 좋아해마지않던 분식집 신신원 앞에서.
"나 생각해봤는데 그동안 니가 한군이 잘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한군 오빠 귀엽고 무엇보다 너 예뻐해서 어쩔줄 몰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어.
참았다가 쑥스럽게 너 한 번 안아주고 가는 모습도 예뻤고, 그래서 그애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
근데 지난주 말에 니가 그애 다시 만났다는 네 말 들으니까 아직 둘 다 감정 정리가 안 된 거라면, 불안한 나중은 생각하지 말고 현재 사랑하는 감정으로 다시 만나보면 어떨까 싶더라. 나도 철이 만나면서 하루하루가 불안했어. 불안하기로 따지면 내가 너보다 더 먼저였고 더 심했다고.
후회할 것 같으면 진심을 다해 그애 잡아."
회식이라더니 술 한잔 했나 보다. 그래도 기특한 것. 이제 어느덧 반세기가 지나 모두들 식상해 할대로 식상해 하는 나의 지나간 사랑에 대해 고민 해주다니. 오지랖이 넓기도 하지. 둘도 없는 친구기 때문이겠지만.
근데 친구야, 내가 잡으면….진심을 다해 잡는다면 그가 돌아올까?
[기다림, 그리고 체념]
헤어졌지만 나는 여전히 그의 연락을 기다린다.
그와 헤어지기로 결심하면서 든 생각 중 대부분은 다시는 나를 기다리게 하는 사람은 만나지 않을 거라는 거였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헤어진 지금도 나는 여전히 그의 연락을 기다리며 잠을 설친다.
내가 그를 보고 싶어하는 날, 그는 왜 항상 내게 와줄 수 없는 걸까?
[시위]
신촌 부근 대학교 학생들이 집결하는 대규모 시위가 예상된다는 기사를 읽자마자 마음이 불안했다.
[text]
나: 도서관이야?
그: 어 내일 시험 있어서 열공중ㅠ
그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고 했다.
다행이다. 물대포를 맞으며 짓밟히면서도 타도 이명박을 외치며 시위를 해주는 시위참가자들이 고맙기는 하나 그래도 그녀석이 거기 있을까봐 걱정이 됐다.
차라리 내가 그 시위대에 참가하면 했지.......
이런 나를 두고 P선배는 오지랖 한 번 넓다며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한 번 넓어진 오지랖은 좀처럼 좁아질 생각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입국하던 날, 인천국제공항에서]
인천 국제 공항을 한 번이라도 가 본적이 있는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 것이다.
국제 공항발 리무진 버스에서 내려 공항 내로 진입하는 그 내부가 바로 3층이며, 국제선 게이트로 이어진다는 것을. 외부에서 진입해 들어와 첫 발을 디디는 공간이 1층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는 우리로서는 헷갈릴 수도 있는 노릇이나 어찌되었건 인천 국제 공항 구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어쨌거나 일년 전 몹시 더운 어느 날,
나는 수많은 게이트 중 그가 서 있을 것만 같은 왼쪽 세 번째 게이트를 통과해 한국에 입국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다르게 그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나는 지나가는 공항 직원에게 이 곳 외에 국제선 탑승 고객 게이트가 따로 마련되어 있는지 수차례 물어 보았다. 직원들은 대답은 한결같았다. “인천 국제공항에는 3층 외에 국제선 탑승 게이트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그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 리 없었던 나는 외워두었던 그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그가 애먼 곳에서 나를 기다리며 헤매고 있을 것 같아 불안했다.
내 예상과 달리, 한참 만에 전화를 받은 그는 수강신청을 하고 오는 바람에 조금 늦었다며 아직 버스 안에 있으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했다. 나는 아직도 버스 안이라는 그의 말에 화가 났다.
욱하는 성질을 참지 못해 그에게 먼저 잠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버리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애초부터 그럴 마음은 없었다.
이대로 내 마음대로 혼자 서울로 가버리면, 그가 화를 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그보다 앞서 나는 그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공항 밖으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었다.
그에겐 기다리지 않겠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를 기다렸고 우리는 드디어 1시간 30분 만에 만났다.
땀을 흘리며 내게로 뛰어 온 그는 나를 보자마자 와락 안으며 미안하다고 했다.
나를 위해 마중을 나온 그가, 지금 이렇게 내 앞에서 땀을 흘리며 진심으로 미안해하고 있는데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다시는 보지 않을 것처럼 화를 내며 다투고, 사소한 일에 삐쳐서 며칠씩 퉁퉁 부어 있어도 결국 미안하다는 말로 끝나버리는 싱거운 싸움을 많이 했다.
가끔은 그 싸움들마저 그립다.
이유없이 토라지고 화내는 말괄량이 못된 너구리가 없어서 조금은 편하게 지내고 있을까?
[기다림=기쁨]
S사 매각 관련해 K사 개발 실장님을 만나러 간 자리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나의 시선이 그의 캘린더로 향했다. 그리고 한참을 멍안히, 나의 시선은 그쪽에 멈췄다. 거기에는 그런 문구가 있었다. 기다림은 곧 기쁨이다. 당신이 문을 열고 들어오기 전부터 나는 이미 기쁨에.......여기에 오버랩 되는 어린왕자와 장미 이야기.
‘니가 오후 세시에 온다면 아마 난 세시부터 기뻐질거야’라고 했던 어린왕자의 그 장미.
나는 이제서야 겨우 기다림이 주는 기쁨에 대해, 그리고 그 행복에 대해 알아가기 시작했다.
5분만 늦어도 화를 내고 토라지곤 했었지만,
사실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내가 얼마나 행복하고 기뻤는지는 전하지 못했다.
[이명박을 옹호하는 모임?]
이틀 전 꿈에서 또 그를 만났다.
생글생글 웃으며 다가 온 그는 무슨 말인가를 건네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어제는 <이명박을 옹호하는 모임>이라는 말도 안 되는 모임에서 만났다는 웬 참하고 머리 긴 여자아이와 다정하게 내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고 있었다. 대체 이 꿈은 뭐지? 사실 꿈보다 그런 모임에 그가 나가고 있다는 사실에 꿈속의 나는 더 황당했다. 간밤 내가 꾼 황당한 꿈 이야기를 듣고 나서 회사 선배는 이렇게 말했다.
“사진까지 찍었으니 백발백중 지금 만나고 있는 사람과 좋은 일이 있는 거네!
아니면 그 남자한테 굉장히 좋은 일이 있는 거야.
사업가면 사업으로 성공하는 거고, 취업을 할 수도 있는 거고. 뭔가 좋은 일이 생긴 거라구!”
일단 나쁜 일이 아니라니 다행이다. 여자친구와 잘 사귀고 있고 그래서 결혼까지 한다고 해도 내가 관여할 바 아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그래도 한때 열렬하게 사랑했단 한 사람의 기억 속에서 철저히 박제(봉인)되어 더 이상은 날개짓을 할 수 없는 나비가 되었다는 점이다.
며칠 전엔가 일 때문에 만난 J 이사님이 혼자 사는 할머니와 실패한 아티스트의 공통점에 대해 물었다. 둘 다 영감이 없다! 참나. 눈먼곰 말에 의하면 녀석이 삼성반도체 취업이 최종 확정됐다고 한다. 꿈이란 것이 참 오묘하다. 그가 바라던 일이었고 노력한 끝에 얻어낸 결과라는 거 잘 안다. 한 발 한 발 그의 길을 향해가고 있는 모습을 옆에서 바라봐줄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언젠가 그가 그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이상형은 자신이 어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동안 비록 소홀하게 대할지라도 지칠 때 바라다보면 한결같이 같은 곳에 서 있어주는 사람이라고.
그때 난 그의 이상형은 되어줄 수 없을 것 같다고 잘라 말해 그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그가 목표를 이루는 동안 내가 그를 기다려줬다면 어땠을까.....
[비보 전달자, 눈먼곰]
눈먼곰에게서 연락이 왔다.
호연이가 술을 쏜다고 하니 수원에서 모이자는 것. 별다른 약속이 없었으면, 그리운 녀석들 만나러 수원으로 갈 수도 있었으나 선약이 있었기 때문에 도저히 갈 수 없었다. 그리고 다음날 일요일 오전. 다음달 기사에 대한 기획안을 짜내기 위해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눈먼곰에게서 전화가 왔다. 헤어진 여자친구를 다시 잡기 위해 편지를 썼는데 그 편지 내용을 좀 체크해 달라고. 3인칭 시점으로 써내려 간 그 편지는 진심은커녕 쏘울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마치 네이버에 변심한 여자친구 돌릴 수 있는 말 한마디라고 검색어를 입력하면 나올 법한 유치한 이야기들 일색이었다. 독하게 비판을 퍼붓자 녀석은 보란듯 내 가슴을 후벼 파놓았다.
‘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다는 거다.
그래도 다행이다. 그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긴 시점이 바로 지금이라서.
조금 더 일찍이었거나, 조금 더 여유로웠던 시기였다면 아마 무척 힘들었을거다.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된 즈음이었고 회사를 옮긴 뒤, 마침 몸도 마음도 무척 바쁜 시기라 그나마 다행이다.
그에게 새로운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사실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지만 막연히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여자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 외 다른 남자가 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거라는 없는 것처럼 그도 여전히 나 아니면 안 될거라는 착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그가 소개팅을 한다거나, 새로운 여자를 만날 때마다 그의 소식을 낱낱이 알려주는 눈먼곰이 너무 밉다. 하지만 그의 소식을 묻는 건 언제나 내 쪽에서 먼저였으니 누굴 원망할 일도 아니다. 원망해야 할 대상은 눈먼곰이 아니라 헤어진 지 2년이나 지났는데도 여전히 그의 소식을 궁금해하며 미련을 떨고 있는 ‘나’다.
[헤어지고 맞는 두 번째 생일]
그를 알고 나서 맞이하는 그의 세 번째 생일이다. 헤어지고 맞는 두 번째 생일이기도 하고.
내년 그의 생일이 돌아올 때쯤엔 나의 마음이 그로부터 조금 더 멀리, 도망갈 수 있을까?
맛있는 밥 먹고, 좋은 사람들 만나서, 행복한 하루 보냈으면 좋겠다.
[회환]
즐겨보는 <세바퀴>라는 프로그램에 최근 들어 <시인의 마을>이라는 새로운 코너가 생겼다.
정해진 주제에 따라 출연진이 시를 지으면, 그 중 제일 잘 된 시를 뽑아 장원을 선정한다.
세바퀴에 출연할 일은 없지만 왠지 창작욕이 발동하여 나도 시를 한 번 써봤다.
회환
그때 네가 주었던 그 꽃은 너의 마음이었던가, 아니면 그냥 꽃이었던가.
그때 그 꽃이 붉은 장미였는지 노란 후리지아였는지 그것도 아니면 순백의 카라였는지..
우리가 처음 입맞추었던 곳은 나의 집 앞이었는지 공원이었는지 그냥 길가였는지..
네가 내게 손을 내민 것이 먼저였는지 내가 네게 마음을 연 것이 먼저였는지
누가 먼저 감정에 솔직했었는지....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너 떠난 이후 그렇게 모든 것은 불분명해져 갔다.
그날, 그 어두운 밤하늘 나무 아래 우리 둘.
유난히 쿵쾅거렸던 네 심장 그리고 내 심장 소리마저 기억나지 않았다면
마치 그건 처음부터 없었던 일인양 잊혀졌으리라.
맞장구쳐줄 네가 없는 우리의 기억은,
그래서 슬프고 쓸쓸한 '과거'가 돼가나보다.
[이야기의 시작]
그가 생각날 때마다 Mc 한새의 ‘이야기의 시작’이란 노래를 즐겨 들었다.
혹시 이 노랫말처럼 우리도 우연히 만난 거리에서 우리의 두 번째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아서....는 아니고, 홍경민의 걸죽하면서도 허스키한 목소리와 MC한새의 랩이 너무도 잘 어우러져서 그저 듣기 편했다.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왠지 서글프고 속상했던 마음도 가라 앉는 것 같다.
언젠가 그에게 준 내 비타민의 효능 효과를 믿는다면, 너무 장난 같으려나?
[헤어진 그가 나를 ‘누나’라고 부른다면…]
가끔 너무 또렷하게 기억나서 마치 아직도 그가 내 옆에 있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억 속 그를 현실 속에서 만나고 싶을 땐, 또 그냥 그렇게 그의 번호를 눌러본다. 지난 2년 동안 생긴 버릇이다. 차마 통화버튼을 누를 용기는 없어 문자를 보내본다.
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를 놓치던 그날, 네 모습이 아직 너무 생생하다고.
별일 없느냐고, 건강챙기라고. 어차피 답변을 기대하고 문자를 보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에게서 답변이 오니 마음이 편했다.
잘 지내고 있다고, 신입사원이라 요즘 눈코 뜰 새 없으니 시간 나면 같이 한 번 보자고 했다.
“연상 연하 커플 헤어지고 나서 제일 슬픈 게, '누나'라고 부르는 거라면서요.”
언제가 A후배가 장난스레했던 말이 생각나서 오기랍시고 언제가 어느 취한 밤 전화를 걸어 그에게 말했다.
"이제 누나라고 불러"
그가 말했다.
“한 번 친구는 영원한 친구기에 그럴 수 없어. 넌 그냥 영원히 내 친구야. 누나로 돌아갈 수는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 라고.
나쁜 놈의 시키.
그땐 화난 척 뾰루퉁해 있었지만 사실은 그 말이 무척이나 듣기 좋았다. 영원히 친구로 남아 있을 거라는 말. 누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말. 나도 다시 그의 누나가 되고 싶은 생각은 1도 없다.
[겨울사랑]
강남 교보문고 현판에는 철마다 다양한 문구가 바뀐다.
그 글들은 언제나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한다.
올 겨울 나를 흔들어 놓은 건 문정희 님의 겨울 사랑이란 시의 한 대목이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서성대지 말고.
눈송이처럼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누구에게로 가고 싶었던 걸까. 저 문정희라는 시인은.
나는 또 왜 이토록 머뭇거리고 서성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