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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식 Dec 25. 2020

그 작고 섬약한 소리

성탄절 아침에


그 작고 섬약한 소리

성탄절 아침에



   3년 전의 새벽을 기억한다. 알람을 맞춰놓지도 의식적으로 노력하지도 않았는데, 누군가 내 몸을 들어 올린 듯 저절로 일어나 책상에 앉았던, 어떤 피로감이나 이물감없이 유난히 명료한 의식으로 오늘이 성탄절이구나, 를 담담히 인식했던 그 아침을. 멀리서부터 검푸른 빛이 허공에 천천히 번져가고 있었다. 나는 그런 풍경이 신비로워서 핸드폰 카메라로 차분히 셔터를 눌렀다. 은밀한 감격에 혼자 겨워하면서 몇 시간 후 교회 초등부에서 전할 설교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묵묵한 어둠에 균열을 내고 어떤 노래가 희미하게 창가로 날아들어왔다. 아직 속삭임에 가까운 소리라서 처음에는 환청이라 착각도 했었다. 그러나 노래는 꾸준하게 낮은 소리로 세상에 퍼졌다. '아직 새벽인데, 대체 누가...' 생각할 무렵, 익숙한 멜로디가 들렸다. 찬송가였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주의 부모 앉아서 감사 기도 드릴 때

아기 잘도 잔다 아기 잘도 잔다


   4분음표마다 핸드벨이 울리던 찬양이 어찌나 은은한 온기로 집집마다 날아들었던지, 깊이 잠든 아기 예수님의 볼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여인의 손길 같았다. 어떤 분들일까,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먼 곳에서 들렸던 소리가 조금 커졌을 때, 급히 창문을 열고보니 열 명 남짓한 어른들이(아마도 교회의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일) 걷고 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면서, 지나치게 들뜬 기색으로 자신들만의 감정에 취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은 묵묵히 온 세상을 축복하고 있었다. 그게 문득 하나님의 사랑, 그 표현 방식과 비슷한 데가 있는 것 같다고 나는 느꼈다. 거칠거나 기습적이며 압도적인 무력의 행사가 아니라, 아기의 뺨을 쓰다듬는 여인의 부드러운 손길처럼, 천천히 어둠에 번지는 어른들의 담담한 새벽송처럼.


   조카 지호가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이의 울음을 보고 놀란 적이 있었다. 울음소리가 이렇게 희미할 수 있구나, 라는 것 때문이다. 갓 태어난 생명이 세상에서 점유하는 물리적인 공간도, 내뱉는 소리도 이처럼 작고 섬약하다는 걸 그때 새삼 나는 느껴서, 여전히 희미한 소리로 울고 있는 지호가 애처롭고 애틋했다. 아마도, 아기 예수님도 이렇게 우셨을 것이다. 고요하고, 섬약하게, 그러나 온 힘으로.


   그렇게 자신을 돌보는 부모의 손길을 간절히 기다리셨을 것이다. 작고 연한 몸을 들어 안는 엄마와 눈을 맞추면서 물방울같은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셨을 것이다. 힘껏 울었다가 엄마 품에 안겨 자신의 등을 어루만지는 손길을 느끼면서 서서히 울음을 그치기도 하면서, 때로는 부모보다  일찍 잠에서 깨서 아직 잠든 부모의 얼굴 골똘히 들여다보면서,  통통한 손으로 몸을 건드리기도 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어딘가 맹목적인  같다. 그리고 이런 생각까지 조심스럽게 든다. 어쩌면 맹목적인 사랑의 크기는 부모 편에서 주는 것보다 아기 편에서 부모에게 보내는   크지 않나, 라는 생각이. 아기 예수님은 그렇게 부모를 사랑하셨을 것이다.  작고 섬약한 목소리와 연한 몸으로, 맹목적인  힘으로.


   신의 사랑은 어른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나기도 하지만, 아기 예수님의 울음소리를 통해 나타나기도 한다는 , 나는 32번째 성탄을 맞고서 이제야 조금 안다. 아직 모두가 깊이 잠든 새벽 메리 크리스마스. (2020. 12. 25. Christm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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