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이 가을에 20210816
덜컹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습니다. 서늘한 바람이 창을 넘어옵니다. 태풍이라도 시작되려는지 커튼이 춤을 춥니다. 말복 더위가 마지막 힘을 쓰는가 했는데 가을이 어느새 내 눈치를 봅니다. 창문을 닫고 돌아서려는 순간 무엇인가 옆구리를 스치는 듯 바닥으로 떨어집니다. 전등의 스위치를 켰습니다. 종이 마리입니다. 아내가 ‘농가월령가’를 써놓은 화선지입니다. 더위를 피해 아침저녁으로 서예 연습을 하더니만 어제는 견딜만하다며 전지 한 장을 써 내려갔습니다.
아내는 서예를 시작 한지 꽤 오래됐습니다. 내 성화에 어쩔 수 없이 붓을 잡더니만, 재미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봄에 국전에 작품을 출품했는데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축하한다고 말해주었는데 별로 좋아하는 눈치가 아닙니다. 표현을 잘하지 않는 성격이니 그럴 만도 하지만 처음에 상을 받았을 때와는 다릅니다. 여러 번 받다 보니 반가운 정도가 감소한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야 좋아하리라고 믿는다.
떨어진 종이 마리를 책상 위에 놓고 누우려다 전등의 스위치를 켰습니다. 그냥 무심코 다가가 종이를 펼쳤습니다. 농가월령가 중 구월령입니다. 봄에 작품을 출품할 때는 ‘팔월령’을 냈는데 돌아오는 길에 후회의 말을 했습니다.
“오월인데 팔월 걸 냈네.”
“글씨만 좋으면 됐지, 계절이 뭐 영향을 미치겠어.”
내용을 읽어보는 순간 가을에 어디엔가 출품하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국화가 피고 서리가 내리는 시기가 되면 전시회가 열릴지 모릅니다. 서예와 사군자의 조합은 선비의 모습을 연상케 합니다. 긴 세월이 사람들의 생각을 그렇게 만들어 냈습니다. 지금의 젊은이들도 그렇게 느낄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는 그러합니다. 할아버지, 아버지, 우리들의 세대를 보고 자랐으니 익숙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국화는 가을을 대표하는 꽃이라 이에 알맞은 내용을 담는다면 어울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요즘 아내에게 수묵화를 배울 것을 권합니다.
“글씨는 그만하면 됐고, 사군자를 배우면 좋겠구먼.”
서예라면 아내보다는 내가 먼저 시작했습니다. 하다 말다를 반복하다 보니 처음이나 나중이나 그게 그거입니다. 혼자 익힌다는 것은 어렵습니다. 시작한 동기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미술교육 과정에는 서예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업 시간에 아이들에게 무작정 기능이나 지식도 없이 하라고 말하기에는 마음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 다닐 때 붓을 잡아본 것이 전부입니다. 어쩔 수 없이 교본을 앞에 놓고 혼자 연습해야만 했습니다. 밤이면 숙직실에 앉아 쓰기를 반복했습니다. 학교에 있는 지난 신문지는 내 연습장 역할을 했습니다. 몇 해가 지나자, 아이들의 상장과 졸업장은 내 손에 의해서 써졌습니다. 남들이 싫어하는 것을 나는 나서서 했습니다. 생각의 차입니다. 상장이나 졸업장을 쓰는 것도 연습이 되는 것 아닌가. 덕분에 담임선생님들로부터 자장면도 얻어먹었습니다.
혼자 한다는 것은 게으름을 피우기 쉽습니다. 의지가 없다면 이내 포기하게 됩니다. 지루해서, 바빠서 등으로 스스로 자신을 놓아줍니다. 내 글씨는 누구에게도 호평받지 못했습니다. 구성은 괜찮은데 뜯어보면 글씨가 세련되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나도 인정합니다. 누군가로부터 배운 것이 아니라 서체를 보고 나름대로 익혔으니 내 필체가 내 손안에 고정된 셈입니다. 하다 말기를 반복한 나와는 달리 아내는 꾸준히 선생을 찾아 익혔습니다.
며칠 전에 보니 화선지가 떨어진 듯합니다.
“한 장 남았어요.”
어제 화선지를 사 왔습니다. 날씨가 선선해지기 시작하니 본격적인 연습이 시작될 모양입니다. 지금 보고 있는 ‘구월령’은 새 종이에 쓴 게 분명합니다.
국전을 다녀온 느낌입니다. 그동안 전시회의 작품을 감상할 때 내용보다 글씨의 모양이나 서체에 대해서 중점을 두었습니다. 이번에는 눈이 하나가 더 추가되었습니다.
‘시대가 변하는데 왜 글의 내용은 옛것뿐이지.’
요즈음 시대에 맞는 글도 추가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끔 눈에 뜨일 뿐입니다. 캘리그래피라는 서체가 추가되기는 했지만, 다른 서체에도 현대적인 내용의 글이 한자리를 차지하기를 기대합니다.
나는 요즈음 한국화에 입문했습니다. 말 그대로 맛보기 과정입니다.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지만 그만두기는 싫습니다. 이것저것 경험을 해본다는 것에 의미를 두기로 했습니다. 수업 중 굽지 않은 도자기 접시도 받아 놓았습니다. 보름 후면 표면에 그림을 넣을 거랍니다. 이왕 하는 거 잘해보아야겠습니다. 이 가을에 맞는 그림을 생각해 봅니다. 이에 어울리는 글도 구상해야 합니다.
서리가 내릴 즘이면 아내의 작품과 내 도자기 접시가 어우러질지 모르겠습니다. 밤에도 흰 구름은 뭉게뭉게 하늘을 문지르고 있습니다. 저게 나의 그림이 될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