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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지안 Oct 19. 2023

#40 새로운 숫자

소설 연재


재인의 일상에는 분명 어떤 일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 일 없는 듯 끊임없이 흘러간다. 집에 들어오면 여전히 엄마의 빈자리가 느껴진다. 그래도 이제 매일같이 눈물이 나지는 않는다. 아빠가 술잔을 기울이는 날도 점차 줄어간다.


오늘은 2023년 1월 27일 금요일이다. 엄마가 하늘나라로 떠난 지 49일째 되는 날. 49제는 고인을 추모하 중요한 불교 의식이다. 특별한 종교가 없는 재인과 아빠는 서로 약속하지 않았지만 같은 마음으로 납골당에 갈 채비를 하고 있다.


매서운 칼바람이 불고 추운 공기는 여전하지만 햇빛이 쨍한 맑은 날씨다. 아빠가 운전하며 재인에게 말한다.


“재인아, 오늘 날씨 좋다. 그렇지?”

“그러네요. 아빠.”

“시간이 언제 이렇게 빨리 지나갔는지…”

“그러니까요…”


재인은 아빠를 바라본다.


“아빠.”

“응?”

“고마워요.”

“뭐가?”


아빠는 웃으며 재인 쪽을 슬쩍 본 후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그냥요… 그냥… 아빠가 잘 버텨주셔서 저도 옆에서 버틸 수 있었어요.”

“아니야. 아빠가 더 잘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미안하지.”

“에이, 아니에요.”


조금 뒤 납골당에 도착한다. 짐을 챙겨 제전실로 이동해 준비해 온 제사 음식을 상 위에 한 접시씩 올린다. 순서에 맞게 제를 지내고 아빠가 먼저 입을 연다.


“여보, 잘 지내고 있지? 우리 왔어… 당신 입맛에 안 맞아도 우리 생각해서 맛있게 먹어… 여보… 당신 우리 지켜보고 있는 거 맞지? 재인 엄마… 많이 보고 싶다…”


재인의 눈 주변이 발갛게 변한다. 아빠는 그러고도 한참을 엄마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재인은 아빠와 엄마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천천히 기다린다. 그리고 말한다.


“엄마, 나 왔어요. 엄마가 말씀하신 대로 나 잘 지내고 있어요. 너무 잘 지낸다고 서운하신 건 아니죠? 아빠랑 나 이렇게 잘 지내고 있으니까… 엄마 걱정 안 해도 돼요… 그리고 솔직히 아직도 엄마 생각 많이 나요…”


재인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조금 뒤 납골당을 빠져나온 부녀는 근처 칼국수집으로 이동한다. 김이 나는 뜨거운 해물 칼국수의 육수가 뽀얗다. 아빠는 재인의 그릇에 먼저 음식을 덜어준다.


“많이 먹어라.”

“네, 아빠 우리 같이 맛있게 먹어요.”


아빠와 재인은 뜨거운 국물을 입으로 후 불어서 아삭한 김치까지 곁들여 맛있게 먹는다.


“재인아, 너 준영이랑 정리 잘했어?”

“네?”

“준영이가 너 걱정 많이 한다더라…”

“아… 네… 오빠랑은 헤어졌어요…”


아빠는 칼국수 면발을 입에 넣는다.


“준영이는 그런 거 같지 않던데… 너는 아예 마음 정리 다 된 거야?”

“음… 그냥… 사실 잘 모르겠어요… 그 뒤로는 더 생각해 보지를 않았어요.”

“그래, 뭐든 재인이 너 마음 가는 대로 해.”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형구 아저씨께서 아빠를 너무 잘 챙겨주셔서 항상 감사한 마음 가지고 있어요…”


재인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아빠는 다시 대화를 잇는다.


“재인아.”

“네.”

“형구 아저씨가 아빠 챙겨주는 거, 그건 신경 쓰지 마. 네가 신경 쓸 게 아니야. 그 고마움은 아빠가 표현하면 충분해. 아빠는 오히려 아저씨랑 아빠 관계 때문에 혹시라도 재인이 네가 준영이한테 미안해할까 봐 괜히 걱정했는데… 잘 정리했다니 다행이다.”


재인이가 아빠를 쳐다본다.


“아빠…”

“재인아… 아빠는 재인이 네가 앞으로도 살면서 아빠를 먼저 생각해서 어떤 결정을 하는 건 안 했으면 좋겠어. 엄마 없어도 아빠는 앞으로 잘 살 수 있으니까 뭘 하든 재인이 너를 가장 우선순위에 놓고 판단해. 알겠지?”


재인은 아빠의 말 때문인지 칼국수 때문인지 마음속이 따뜻하게 차오르는 걸 느낀다.


“네… 사실 저도 아직 제 마음을 잘 모르겠어요… 준영 오빠한테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은 건지… 아닌지조차 모르겠어요… 오빠는 계속 연락 오기는 해요… 저도 싫지는 않지만…”

“그것도 지금 네가 모르겠으면 모르는 게 맞아. 급하게 결정할 것 없으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재인이 네가 네 감정을 잘 살펴보고 천천히 판단하면 돼.”

“네, 아빠. 그래볼게요.”


집으로 돌아온 재인은 낮잠을 한숨 자고 일어나 책상에 앉는다. 옆에 놓인 책 중간에 끼인 책갈피를 빼고 이어서 읽는다. 진욱이 준 책도 이제 거의 다 읽어간다.



***



다음 해 가을 어느 날, 한 산부인과에서 아기의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진다. 그리고 간호사 유니폼을 입은 민아의 밝은 목소리가 들린다.


“2024년 10월 3일 오전 11시 여아입니다.”


며칠 뒤 잠에서 깬 아기의 눈에는 재인의 머리 위 숫자가 어렴풋이 보인다. 그리고 그 옆에 아빠의 얼굴 그리고 또 다른 숫자 조합도 흐릿하게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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