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에 사는 생명과
물에 사는 생명은
물리적으로 가까워지기 어렵다.
호흡부터가 다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현실에서 불가한
인간과 물고기의 공존을
끊임없이 상상했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물고기의 공존을 그리는
애니메이션 두 편을 소개하려 한다.
디즈니 '인어공주'와 지브리 '벼랑 위의 포뇨'다.
이 두 작품의 공통점은
물고기가 '인간세계'를
꿈꾼다는 것이다.
우연히 한 인간을 만난 후
인간 세계에 살고 싶다는
열망은 멈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래서 그들은 '대가'를 치른다.
인어공주는 '다리'를 얻기 위해
'아름다운 목소리'를 포기한다.
포뇨는 '다리'를 얻기 위해
'아버지의 우물'을 파괴한다.
두 작품 모두
땅과 바다를 연결하기 위해
물고기를 인간화시킨다는 공통점이 있다.
나는 반대로 생각해 봤다.
인간이 '아가미'를 갖는
스토리는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을까?
아가미 인간의 최후
인간이 '아가미'를 가진
스토리가 없지는 않다.
영화 <돌연변이>에서는
30만 원짜리 생동성 실험에
참가한 한 인물이 부작용으로
'생선인간'이 되기도 하며
구병모 소설 <아가미>는
한 인물이 우연히 '아가미'를
갖게 되기도 한다.
위의 작품들과 차이점이 있다면
인간은 '아가미'를 원하지 않았다는 것과
세상은 '아가미 인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가미를 가진 인간은
마치 '암'에 걸린 것처럼
불행하게도 '아가미'를 갖게 되었고
사회는 그를 '돌연변이'쯤으로 취급한다.
'다리'를 얻어 '인간화'에 성공한
물고기는 '인간'으로 행복하게 산다.
반면, '아가미'를 얻어 '물고기화' 돼버린
인간은 '돌연변이'가 된다.
아가미 인간 VS 다리 물고기
작품을 소비하는 주체인
'인간'의 시선에서는
물고기가 '다리'를 얻는 게
흥미롭고 즐거운 스토리일 것이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두 세계를 연결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바다를
건너는 건 '인간'이 아닌
'다른 존재'임은 불편한 감정을 남긴다.
우리는 동물과 공존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동물을 '인간화'시키는 작업을 여전히
시도하고 있다.
이왕이면 개가 '예의 있게' 짖었으면 하는 마음
이왕이면 고양이가 '스크레쳐만' 긁었으면 하는 마음
이왕이면 동물이 '인간처럼' 살았으면 하는 마음
우리는 인간처럼 산책하는 개를 꿈꾼다.
우리는 인간처럼 사회화된 동물을 원한다.
그래서, 공존을 위해 '우리'가
아닌 '그들'을 희생시킨다.
'털 날리는 고양이'와 같이 살기 위해
털을 자주 빗어주는 대신
고양이의 털을 밀어버린다.
'시끄러운 개'와 같이 살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이사하는 대신
'짖지 못하는 개'로 만들어 버린다.
인간 닮은 동물을 상상하는 세상
우리는 여전히
인간으로 변하는 동물을 상상한다.
그리고 '대가'를 치르게 해서라도
'동물'을 인간세상에 머물게 만든다.
그리고 우린 그것을
공존이라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