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토피아로 알아보는 유토피아
문명사회가 완성한 유토피아
주토피아는 (zoo + utopia)는 동물세계의 지상낙원을 뜻한다. 크기와 힘 그리고 종과 상관없이 모든 동물들이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다. 문명 발달로 모든 동물들이 제한 없이 지나갈 수 있는 출입문이 개발되고 종차별 없이 직업을 가질 수 있는 현 문명사회를 의인화하여 보여주고 있다. 주토피아시는 열대우림 구역, 툰드라 타운, 다운 타운, 사하라 광장, 캐니언밸리등의 12가지 구역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런 다양한 생태계는 기계문명의 힘으로 유지된다.
인간 세상을 빗대 표현한 주토피아에는 특이한 점이 한 가지 있다. 인간처럼 스마트폰도 쓰고, 기계도 다루고, 옷도 입고, 전철과 같은 교통수단도 이용하지만 모두 맨 발이라는 것이다.
맨 발로 다니는 동물들이 공존에 성공한 주토피아 사회를 통해 유토피아적 세계를 탐색해보고자 한다.
토끼와 여우가 함께 영웅이 되는 이야기
주토피아 주인공 '주디'는 토끼다. 그녀는 당근농장을 물려받는 안정적인 선택을 거부하고 강한 동물들만 살아남는 '경찰'이 되기 위해 주토피아 도시로 상경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최초 '토끼 경찰'이 되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서의 차별까지는 벗어날 수 없게 된다. 힘이 약한 소동물이라는 이유로 중요한 업무에서 배제당하고 가장 단순한 '주차단속' 임무를 맡게 된다. 주디는 그 과정에서 '영악하고 교활한 동물'이라는 인식으로 인해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차별당하는 여우 '닉'을 만나게 된다. 완벽한 세상처럼 보였던 유토피아에서 숨겨졌던 편견과 차별에 맞서 싸우는 스토리가 전개된다.
교활한 '여우'와 멍청한 '토끼'라는 누명을 쓴 이들은 결국 연쇄실종사건을 해결하면서 주토피아의 영웅이 된다. 그리고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고백으로 엔딩을 마친다. 여기서 이들의 사랑고백은 이성적인 관계가 아닌 모든 존재를 향한 사랑고백인 것이다. 결국, 영화가 주고자 하는 교훈이란 '편견을 버리고 모두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자'가 될 것이다.
나는 주토피아가 의미하고 있는 '유토피아'에 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주토피아 속 숨겨진 차별
주토피아를 좀 더 들여다보면 '위협적인 존재'로 인식된 육식동물들이 역차별당하는 장면이 있다. 교활한 여우라는 누명으로 인해 아이스크림 하나 마음대로 사지 못한 '닉'뿐만 아니라 푸근하고 친근한 이미지를 가졌던 '치타 순경'은 위협적인 맹수라는 편견으로 인해 컴플레인이 들어온다며 다른 부서로 발령을 받기도 한다. 그리고 주토피아 중심 스토리였던 '연쇄실종사건'이 사실은 초식동물 양이었던 '벨웨더'가 육식동물에게 악의를 품고 의도적으로 벌인 일이었음 또한 역차별에 해당한다. '벨웨더'는 난폭해지게 만드는 꽃을 이용해 '육식동물은 난폭하다'는 선입견이 생기게끔 사회 분위기를 조장하는 역할을 한다.
동물의 세계에서 '약육강식' 법칙을 깨고 초식동물이 육식동물을 역차별하는 것이 가능했던 건 그곳이 현존하지 않는 '유토피아'여서가 아니다. 주토피아는 초식동물이 90%로 다수에 속하고, 육식동물이 10%로 소수에 속하는 사회다. 주토피아는 사회적 차별의 원인이 '힘'의 원리로 이해되는 '약육강식'이 아닌 '다수가 소수를 지배하는 사회적 구조'에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사회에서 '약자'로 만드는 원리는 '힘의 세기'가 아닌 '편견'임을 알 수 있다.
문명사회에 살아가는 우리는 누구나 약자도 강자도 될 수 있다.
주토피아는 유토피아가 되었을까?
주토피아는 결국 주디와 닉이 '연쇄실종사건'을 해결하면서 편견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육식동물은 위협적이다'는 선입견이 벗겨진 주토피아는 이전보다는 '유토피아'에 가까워졌을 것이다. 그러나, 마치 모든 것이 완벽한 문명사회에서 신발 신기를 까먹은 존재들이 사는 세계처럼 현존하는 유토피아는 완벽에 가까워질 수는 있으나 완벽할 수는 없을 것이다.
신발 신기를 거부한 유토피아
주토피아 이야기는 잠시 접어두고 완벽한 유토피아를 꿈꾼 하나의 세게를 소개하고자 한다. 1930년대, 올더스 헉슬리가 쓴 소설 속 유토피아 '멋진 신세계'에 관한 내용이다. 이곳에서 인간은 철저하게 기계화되어 있다. 태어날 때부터 계급에 맞게끔 유전자가 조작되고 훈련을 받는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위치에서 사회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면서도 삶에 만족한다. 모두가 행복한 세상인 '유토피아'가 완성된 것이다. 그러던 중 '유토피아'에서 벗어나 자랐던 '야만인'이 이곳에 오면서 멋진 신세계를 끊임없이 추궁하고 비판한다.
“당신들은 자유롭고 인간답게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인간다움과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릅니까?”
그는 자신들의 삶에 아무런 불만도 의심도 갖지 않는 그들에게 '자유'와 '인간다움'을 주장한다. 그리고 결국 멋진 신세계를 떠날 것을 다짐하며 '불행해진 권리'를 요구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이 사회의 중축이던 총통이 이렇게 말한다.
"그렇다면 말할 것도 없이 나이를 먹어 추해지는 권리, 매독과 암에 걸릴 권리, 먹을 것이 떨어지는 권리.... 온갖 표현할 수 없는 고민에 시달릴 권리도 요구하겠지?"
야만인은 '유토피아'를 벗어나기 위해 불행해질 가능성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유로워질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모두가 행복해지기 원하는 이상향적 세상을 향한 욕망은 인간의 존엄과 자유로부터 멀어지는 시도임을 소설은 알려주고 있다.
야만인이 주장한 '인간다움'이란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을 의미한다. 우리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한계는 자연의 법칙으로 생겨나는 온갖 불공평과 불행만 떼어놓으려다 보니 인간의 존엄성을 버려야 하는 사실에 부딪치는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고통 없이는 자유를 갈망하지 않는다. 또한,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통증은 우리를 '인간답게'살게 하기 위한 장치가 되어준다.
주토피아 속 동물들이 신발을 신지 않는 건 유토피아 속 남겨진 동물다움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모두가 행복한 이상적 세계를 지향하며 살아가야 함은 맞으나 주토피아 동물들이 신발 신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주체성을 지닌 인간으로서의 인간다움은 잃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 인간다움이란 무엇일까?
주토피아 속 동물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완벽할 수 없지만 유토피아에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은 '까먹은 신발을 신는 행위'가 아니라 '편견' 앞에 부딪쳐 싸우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적인 세계를 꿈꾸면서도 결코 '신발 신기'를 거부하는 자유의지일 것이다.
신발 없이도 행복을 추구한 주토피아는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유토피아'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