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척척 연구원 생존기] 삶을 지탱해준 다양한 조각들
이렇게 묵혀두다가는 기대감에 부풀던 감정들이 파묻혀 나오지 못할까 봐 서랍에 넣어둔 글을 꺼내 들었다. 지금은 기대라는 빛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그때는 한참 빛을 내며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었기에. 오늘의 나는 더 많은 풍파를 겪으며 단단해졌는데 더 행복해졌는지는 모르겠다. 오히려 세상을 마주하는 마음이 더 닫힌 기분이 든다. 아마 다른 계절을 겪어내고 있는 중이라 그런가보다.
2021년 여름 기록
한 계절이 지났다. 하늘은 맑고 내리쬐는 태양은 뜨겁기만 한데 내 마음은 춥기도 쓸쓸했던 겨울이었다. 잠시의 겨울이라는 시간이 흐르고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봄이 왔다. 자연과는 다른 흐름을 가지고 있지만 새싹을 하나 피워냈다. 토하듯이 뱉어낸 글들이 무색하게 어떻게는 버텨보자는 생각도 자취를 감췄다. 어떤 기록도 하지 않았더라면 그 당시에 내가 어떤 겨울을 보냈는지 몰랐을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의 일이 아닌 것처럼 기억의 조각하나 남지 않았으니까.
한 계절을 겪어낸다는 건 좋든 나쁘든 익숙해진 시간을 떠나보내는 일이기도 하다. 차가웠던 바람이 싫었지만 또 익숙해져 마음이 편하기도 했다. 쓸쓸함도 텅 빈 마음도 놓아 주기가 쉽지 않았다. 어쩌다 보니 버티고 또 버티는 삶이었다. 어차피 내 마음대로 되지 않을 테니 기다려야 할 테니까 나는 그 사이에 내 삶을 살아가겠다는 마음으로 지냈다. 때론 무너지고 세상이 내편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허무하기도 했지만 날 돌본다는 생각으로 잘 챙겨 먹이고 책 속을 여행하고 친구들을 만나기도 하면서 나만의 시간을 쌓아갔다. 이 시간이 나에게는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고 단단해지는 시기라고 믿었다. 그렇게라도 믿어야 버틸 수 있었으니까.
결국 그 시간들이 지나 지금 이렇게 글을 써내려 갈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니까. 헛되이 보내는 시간이 없다는 생각을 한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 시간 내내 새로운 경험을 하고
무엇이든 쌓아갈 수 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새로운 도전을 하고 나를 탐구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사진 촬영 모델이 되어보고, 한국어 과외를 하고, 새로운 방식의 그림을 그려보고, 플루트를 연주하고, 헤드셋을 끼고 거울을 보며 춤을 추고, 이북 리더기를 두 손으로 붙잡고 분신처럼 데리고 다녔다. 인생은 구멍메꾸기가 아닐까. 마음 한 켠이 뻥 뚫리면 얼른 다른 쪽을 열심히 채워넣어야지 균형이 맞춰지니까.
취미란 게 거창할 게 있나. 그저 좋으면, 하고 싶으면 그게 취미인 거지. 오롯이 혼자 있는 시간이 대부분이었던 만큼 취미가 가져야 하는 의미나 보이는 부분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려는 생각도 없었고 나를 증명해야 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으며 행복감을 느끼긴 했으나 바람이 흐르는 대로 몸을 맡기며 잠시 기대었을 뿐이다.
- 2021/07/15 : 요즘 스케치를 하고 색을 입히는 방식이 아닌 바탕에서 색을 쌓아 올리는 방식에 빠져있다. 장미의 형태만 잡은 채 색을 올리는 과정이 답답할 때도 있지만 결과는 마음에 든다. 스케치가 완벽하지 않으면 불편했던 마음이 이 방식을 통해 해소되고 있다. 첫 붓터치에 모든 무게를 싣는 게 아니라 계속 계속 쌓아가는 과정에 기분이 좋다. 지금은 보기 흉할지라도 어차피 과정이고 망치면 다시 색을 쌓으면 된다는 생각에 부담감을 덜어낼 수 있다.
잘하고 싶은 마음은 매번 나의 발목을 잡는다. 잘 보이고 싶은 마음, 잘 해내고 싶은 마음, 그저 누군가가 소중하기에 더 "잘" 보이고 싶은 마음은 나에게 짐이 되었고 그 화살은 상대방을 향하기도 했었다. 마음 자체는 소중하지만 그게 나를 옭아맨다면 주저 없이 쳐내야 한다. 타인을 위한 배려가 아니라 인정받고 싶은 자아가 꿈틀 내는 것이니까.
- 2021/07/17 : 다시 플루트를 잡았다. 친구가 몇달간 빌려준 플루트덕에 10년 만에 다시 잡았다. 연습하는 걸 그렇게도 하기 싫어했는데 이제는 왜 이리 다시 하고 싶은지. 오로지 나와 플룻만 있는 그 시간이 좋다. 마음이 설레고 벅차다. 연습하러 가는 시간이 기다려 진다.
불안감을 털어내기 위해 생각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걸 막기 위해 열심히 움직여야 했다. 쉬는 게 쉬는 게 아니었으니까. 겨울에 삶을 지탱해준 것들은 다양한 조각들이었다. 한 개인도 한 공간도 한 행위도 아니었다.그 모든 조각들이 얽히고 섥켜 단단한 뿌리를 내리고 버텨줬던 것이다. 서있던 원 밖으로 한 발자국만 내디뎠을 뿐인데 내 세계가 조금은 넓어진 기분이 들었다. 성취감에 목말라 있던 시기에 결핍된 욕망을 채워줬다. 어느 날은 그게 10km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불안감에 주저하기도 했다. 그 시간이 지나면 내가 가지는 경험의 폭이 넓어진다는 걸 알기에 그 떨림을 감싸 안으며 계속 걸어갈 것이다.
그래도 봄은 찾아오니까.
[프랑스 척척석사 생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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