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날 - 해녀의집,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월정리, 그리고 동문시장
책 읽기를 즐겨한다. 회사가 조금 멀리 이사한 후로는 통근시간을 활용해 한 주에 1권씩 책을 읽어내고 있다. 독서는 의미없이 떠다니는 시간들에 가치를 부여한다. 피곤한 몸을 이끌고 멍한 상태로 서있는 출퇴근 시간, 어둠 속에 누워 스마트폰 화면만 들여다보는 잠들기 전 30분, 아무도 깨우지 않으면 해가 다시 질 때까지 계속 잘 수 있을 것 같은 주말 아침이 책 읽기만으로 충만해진다.
여행을 할 때에도 반드시 책이 한 권 필요하다. 제주여행을 떠났던 작년 여름 그 무렵, 알랭드보통의 책을 줄줄이 다 읽고는 다음 출판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방문한 서점에서 대학시절 읽었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문득 사게 됐다. 대학시절에는 알랭드보통의 책이 정말(!) 재미없었다. 그때는 한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 정도로 잘 읽히지도 않았고 이해도 되지 않았는데, 나중에 책을 아주 많이 읽기 시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모든 책에는 '50페이지의 법칙'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어떤 책이든 딱 50페이지만 읽고나면 그 뒤로는 술술 읽히고, 뒷 이야기가 궁금해 멈출 수 없어진다. 특히 생소한 지명이 나오거나 등장인물이 너무 많은 경우, 처음 몇 페이지를 읽기가 힘든데 그럴땐 50페이지의 법칙만 믿고 읽어내다보면 어느새 빠져들어있는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샛길로 조금 빠졌지만, 아무튼 그때는 몰랐고 지금은 안다. 그래서 알랭드보통이 참 좋고 재미있고 기다려진다는 얘기다.
1. 월정리해변 카페 달비치
나날이 더 행복했던 우리의 제주여행 마지막 날에는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책을 읽기로 했다. 우리가 선택한 곳은 월정리 해변의 달비치. 4층짜리 건물에 3-4층은 숙박업소이고 1-2층은 카페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바다가 보이는 위치도 탁월했고 커피맛도 탁월했다. 우리는 이곳에서 장장 4시간 가까이 책을 읽었다. 알랭드보통의 덤덤한 문체가 좋다. 간혹 철학적인 이야기를 할 때에는 눈으로만 읽어 내려가고 머리로는 딴 생각을 해도 좋다. 책을 읽다가 창밖을 내다보면 서핑하는 사람들이 새로 오고 떠나고를 반복한다. 유치하게도 내가 이 곳의 터줏대감 같아 기분이 좋았다.
2.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
'여행 둘째 날 올랐던 용눈이 오름에 깊은 감명을 받은 우리는 용눈이 오름을 사랑한 작가 김영갑의 갤러리에 방문하기로 한다.' 이래야 얘기가 될 것 같은데.. 우리는 무계획에 사전조사도 제대로 안했다. 거기 괜찮다더라~ 하는 곳은 네비에 찍어보고 거리상, 시간상 갈 수 있으면 그냥 갔다. 가는 길에 최소한의 리뷰는 찾아봤지만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 하는 리뷰의 홍수에 휘둘리지 않아도 돼서 정말이지 좋았다. 가보니 두모악은 용눈이 오름을 주로 찍은 사진작가 김영갑의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 또한 타지에서 제주에 들어와 살게되며 오름에 남다른 애착을 갖게 되었고 그의 열정을 인정한 제주인들이 카메라와 촬영 장비들을 지원해 작가활동을 도왔다는 사실이 인상 깊었다.
밝은데 어둡고, 따뜻한데 광활하다. 텅 비어 있는데 가득찬 느낌이다.
전시관의 형태가 오름과 굉장히 닮아있어 놀라웠다. 밝은데 어둡고, 따뜻한데 광활하다. 텅 비어 있는데 가득찬 느낌이다.
전시관을 모두 둘러보고 쉬어가는 의자에 앉았더니 테이블 위에 방명록이 올려져있다. 뭐라 쓰긴 쓴 것 같은데 내가 남긴 말은 기억이 안나고, 흘끗 훔쳐본 친구 U의 글이 기억에 남는다. "모든 것이 충만해져서 돌아갑니다." 그녀의 방명록으로 용눈이 오름, 그리고 김영갑 갤러리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만함으로 기억된다.
3. 제주 동문시장
여행지에 오면 반드시 시장에 간다. 떡과 과일을 박스채로 사서 전국 각지의 지인들에게 택배로 보내는 것은 제주 여행자만의 특권이다. 물론 나를 위한 한라봉과 오메기떡도 양껏 구매했다. 달달하고 쫀득한 오메기떡의 맛이 그립다.
KBS <슈퍼맨이 돌아왔다>에서 삼둥이가 먹은 빵으로 유명해졌다는 귤하르방빵. 안에는 따끈한 감귤잼이 들어있고 겉은 바삭하고 빵은 부드럽다. 지하철역에서 파는 델리만쥬를 생각하면 비슷하다. 안에 귤잼이 들어있다고해서 안어울리지 않을까 했는데 왠걸 너무 맛있다. 가격도 저렴하니 제주 동문시장에 간다면 꼭 한 번 드셔보시길 추천한다. 델리만쥬처럼 안에 든 잼이 엄청나게 뜨거워 급하게 먹다가는 입 안을 데일 수 있으니 조심할 것!
돌아오는 비행기를 저녁 7시로 티케팅한 덕분에, 마지막 하루까지 충분히 여행할 수 있었다. 창밖으로 빛나는 제주가 보인다.
나날이 더 행복했던, 제주여행기 끝.
덧,
정말 만족스러워서 나만 알고 싶은 게스트 하우스 <슬로우트립>, 여자 혼자 혹은 여자끼리의 제주여행을 준비 중이라면 강력 추천한다. 차가 없다면 월정리 해변에서 택시로 10,000~15,000원 정도의 거리, 차가 있는 여행자에게 유리한 위치다. 실내 인테리어도 주인장님의 접대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행복했던 제주 여행기를 읽어주신 여러분께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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