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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기유 Aug 19. 2024

당신이라면

이 작품은 자전적 소설입니다.



당신은 갓 취직한 사회초년생.

회사와 집 사이가 멀다. 그래서 집을 알아보는 중이다.


핵심 지하철 노선 3개 라인이 지나는 지하철역 앞 도보 2분 거리에 있는 38평 아파트 월세가 아주 저렴하게 나와 있다.


보증금 300만 원, 월세 40만 원, 관리비 없음


눈이 휘둥그레진다. 어떻게 그 위치의 아파트에 저 금액이 나오지?


자세히 보니 아니나 다를까 조건이 존재한다.

집주인과 함께 살며 방 한 칸을 빌려 쓰는 방식이고, 집주인은 여든을 앞둔 어르신이라는 것이다.


과연 당신의 선택은?



“그 조건이면 가능!”

“절대 불가능!”





실제로 10여 년 전 나는 저 집을 선택했다.

양가 할머니들과의 교류조차 적었던 내가 일면식도 없던 ‘남’ 할머니와의 동거를 선택한 것이었다. 선택할 당시에는 가볍게 생각했던 것 같다. 잠만 자는 공간으로 사용하면 별 특별할 일 없겠거니.

후일 떠올려 보니, 타인과 한 집에서 산다는 것은 서로의 의식과 무의식이 맞물려 예측 불가능한 폭탄을 제조하는 일이었다. 그 폭탄은 곧바로 터지기도 했고, 시간이 한참 지난 뒤 대단한 위세로 터지는 지뢰가 되기도 했다.

하긴 조금만 생각을 해봐도, 어느 한쪽이 먼저 말 걸고 싶어 하고 남처럼 데면데면 지내지 못하는 성격이라면 별 일 없이 조용히 흘러갈 턱이 없었다.



우리의 경우,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


6월 어느 날, 나는 대학교 4학년 1학기 기말고사를 치르고 있었다. 조기졸업을 앞두고 보내는 마지막 학기였다. 5교시 시험을 앞둔 쉬는 시간, 건물 1층 강의실에 앉아 시험 범위를 복습하고 있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눈에 익은 가운데 번호. 복도로 나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진기유 씨 맞지요?”

얼마 전 면접을 보았던 회사의 인사담당자였다. 내게 연봉을 설명해 주고 면접 절차를 안내해 주었던 얼굴이 떠올랐다.

“네, 맞아요!”

“최종 합격 하셨어요.”

기쁨의 비명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주변을 바삐 오가는 무리에 휩쓸려 남쪽 출입구 밖으로 나왔다.

“그럼 언제부터 근무하나요?”

“7월 1일부터인데 괜찮으세요? 준비하실 서류는······”


이후 부모님께 전화로 소식을 알려드린 뒤 강의실에 돌아갔다. 친한 선배들이 내 가방을 보고는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어디 갔다 왔어? 시험공부는 많이 했어?”

“하기는 했는데 다 잊어버린 것 같아요. 오빠는 어때요?”

선배는 대답하지 않고 한쪽 눈썹을 올리며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고 있었다.

“왜요?”

“뭐 좋은 일 있어?”

나는 당황하여 오히려 더 웃어버리고 말았다.

“뭐야, 정말인가 보네? 무슨 일이야? 말해 봐.”

보고만 있던 다른 선배도 거들었다.

“쓰읍! 어떤 놈을 만나는 거야? 우리한테 먼저 소개를 해 줘야지.”

입이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곧바로든 다음 학기든 취직을 원하는 건 모두 마찬가지. 다른 때도 아닌 시험기간에 나의 취직 소식을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하지만 내가 우물쭈우물 하는 사이 선배들은 어느새 있지도 않은 내 남자친구에 대해 둘이서 훈수를 두기에 이르렀다. 이런 장난스러운 상황이 좋아, 짐짓 입을 다물고 있어 본다. 즉석에서 짓궂은 말로 놀리는 건 순발력일까 창의력일까. 몇 마디 후 선배들은 장난을 멈추고 물었다.

“우리 빨리 듣고 시험 공부 해야 되니까 말해봐. 무슨 좋은 일인데 그래?”

내 침묵이 공부를 방해한다면 어쩔 수 없다.

“방금 전에 제가 면접 봤던 회사에서 전화가 왔는데, 합격했다고···”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선배들은 의자에서 엉덩이가 한 번 들릴 정도로 “오!”라고 외치며 놀라더니 열렬히 박수를 쳐줬다.

“축하해! 정말 잘됐다. 너 이제 시험공부 안 해도 되지 않아?”

“그래, 시험지 찢고 나가. 아니다, 지금 나가라 그냥. 나가서 놀아.”

우리는 한동안 깔깔 웃으며 시답지 않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대학시절의 마지막 시간이 그렇게 지나가고 있었다. 이 날의 합격 통보를 기점으로, 그때까지는 전혀 생각지 못한 수많은 인연과의 만남이 예정되었다. 다가올 미래는 상상 못한 채 눈앞의 정든 선배들과 헤어질 때가 왔다는 사실에 아쉬워했다. 



이틀에 걸쳐 교수님들과 그간 가깝게 지냈던 교직원분들께 인사를 드리는 동안, 친구들 뿐만 아니라 건너 건너 알던 사람들한테서도 축하 연락이 왔다. 나 역시 많은 회사에서 ‘광탈’을 당해봤고 취직에 민감한 시기였기 때문에 메신저 상태메시지나 SNS에 아무 글도 올리지 않고 있었는데 소문이란 게 얼마나 빠른지 실감했다.

복도에서 마주친 교양과목 교수님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말했다.

“수업 때도 열심히 즐겁게 참여해서 보기 좋았어요. 앞으로 사회에서도 그렇게만 한다면 못할 게 없을 거예요.”

다가올 변화를 떠올려 보았다. 사원증을 목에 걸고 카페 음료를 들고 걷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광대가 올라가는 걸 막을 수 없을 만큼 설렜다.

하지만 정말 내가 떠올려야 하는 모습은 따로 있었다. 처음 듣는 업무 용어를 정신없이 적으며 인수인계받는 모습, 업무 실수에 한 소리 듣는 모습, 자취방 청소를 하는 모습, 땀 흘리며 가스레인지 앞에서 요리하는 모습, 욕실 배수구를 열고 청소하는 모습, 갑자기 나타난 곤충에 혼비백산한 모습, 또 업무 실수를 하고 혼나는 모습, 그리고 그 옆의 한 사람. 당시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 연인도, 친구도, 동료도 아닌 새로운 인연. 떠올릴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관계. 그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 미래로 나도 모르게 한 발 한 발 다가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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