찜질방 사모님의 전쟁 같은 하루일과
명절이란 뭐랄까. 설레는 건 아이들이고. 힘든 건 어른들. 그중에서도 '찜질방 운영하는 며느리'에게는 진짜 피, 땀, 눈물 3종 풀코스다.
예로부터 명절 전 목욕은 '새해 목욕재계'라는 근엄한 의식이었다. 몸을 씻고 마음도 씻고 잊고 싶은 것도 잠깐 씻는다. 그래서 명절 전 찜질방은 늘 문전성시다. 연휴 전날엔 성묘 가기 전 몸을 씻으려는 남자 손님이 단체로 찾아오고. 당일엔 가족 단위 손님이 몰려든다. 오랜만에 만난 손자, 손녀를 직접 씻기려는 할머니. "엄마, 제가 씻겨드릴게요." 하고 팔 걷은 아들딸들의 효심이 탕 안에서 수증기처럼 피어난다. 연휴 막바지엔 파김치가 되어버린 며느리들이 몸과 정신을 데우러 몰려든다. 찜질방이 아니라 '공감방'이 되는 날.
우리에게 명절은 대목이다. 하지만 동시에 가장 혹독한 서바이벌이기도 하다. 남편은 거의 좀비의 문턱에서 일한다. 낮과 밤 가리지 않고 새벽까지 기계 관리, 난방과 물 수위 조절, 세탁방에서 빨래돕기 등 멀티플레이의 끝판왕이다. 그렇게 살아왔단다.
그 와중에 시댁에서는 제사도 지낸다. 명절 전날 시댁 가서 전 부치고(거의 시어머니가 하시지만) 다음 날 새벽같이 제사를 지낸다. 바로 친정 들러 밥 한번 '먹었다' 수준으로 먹고 바로 찜질방으로 출근. 찜질방 사위를 둔 친정 부모님은 사위와 손주를 보는 게 UFO 보는 것보다 어려운 수준이다.
그날도 이런 와중이었다. 손님이 몰려 옷장이 부족해졌다. 고장 난 옷장을 수리하러 여탕으로 들어갔다. 여기는 남자 출입이 불가하므로 내가 간다. 그때 한 손님이 옆에서 말한다.
"지금 옷장 고치는 거예요? 여탕에 남자가 못 들어와서 직접 고치는 거예요? 미치겠다. 정말."
이게 지금 감탄인지, 기가 막힌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바쁜 와중에 인기척 해주는 거라 여기며 기분 좋게 생각한다.
"네. 남자가 못 들어오니까 제가 고쳐요." 라며 땀을 훔쳤다.
항상 혼자 고치는데 이 날은 두 명이다. 바로 남편의 여동생. 아가씨. 나의 기술 사부님. 아가씨는 멀리 살아 자주 못 오지만 명절엔 꼭 도와주러 온다. 옷장, 신발장, 수도꼭지 고치는 기술을 스파르타식으로 전수해준 내 스승님. 우리 둘은 여탕 기술부 2인조다.
한창 옷장 수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 손님이 격앙된 목소리로 외친다.
"여기 직원이세요? 하수구가 막혔어요!"
그 말에 '하수구가 막힌 걸 기분 좋게 말하는 사람은 없지.'라고 혼잣말을 하며 웃어보려다 곧바로 정신 차린다.
"네! 제가 바로 뚫어 드릴게요. "
하수구 뚫기의 세계는 깊고도 넓다. 나, 뚫어뻥 3총사를 보유한 여자다.
1. 일반 뚫어뻥
2. 공기압 뚫어뻥
3. 탄산총알 뚫어뻥
가장 오른쪽에 있는 것은 우리가 흔히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뚫어뻥이다.
중간에 있는 것은 공기압 뚫어뻥이다. 검은색 손잡이를 양손으로 잡고 펌핑하여 공기압을 넣고 손잡이 부분에 버튼을 누른다. 펌핑하며 모아졌던 공기압이 한 번에 들어가 뚫리는 방식이다.
가장 왼쪽에 있는 것은 뚫어뻥총알이 들어있는 뚫어뻥이다. 압축탄산가스가 들어있는 뚫어뻥총알을 넣고 버튼을 누른다. 발사 동시에 배출되는 탄산의 강한 압력으로 뚫리는 방식이다.
하수구 막힐 일이 많아 하수구가 시~원하게 뻥 뚫린다는 광고만 보면 사고 싶은 욕구가 셈 솟다 보니 이렇게 3개가 생겼다. (저 3개보다 강력한 것을 찾는 그날까지 나의 지름신은 끝나지 않을 듯.)
이름만 들어도 강력해 보인다. 이쯤 되면 거의 무기상이다. "하수구가 막혔다."는 말에 심장이 뛰는 건 다 내가 쌓아온 무기고에 대한 믿음 때문이다. 하수구 뚫는 전문가는 아니지만 지금 이 순간은 전문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의 하수구는 황토사우나와 이슬사우나 사이. 두 구멍이 연결돼 있는 쌍둥이 하수구였다. 이미 물이 한강처럼 고여 있고 냄새는 거의 '하수구 고전 오케스트라' 수준이다. 손님들은 발뒤꿈치를 들고 아슬아슬히 통과 중이었다. 나는 바지를 무릎까지 동동 걷어 올리고 물 속을 향해 돌진했다.
하수구 구멍이 양쪽에 2개라 2인 1조가 되어야 한다. 한쪽만 하면 옆 쪽 구멍으로 바람이 새기 때문이다.
먼저 일반 뚫어뻥을 사용해 본다. 될 리가 없다. 그 정도로 막힌 거였으면 심하게 막히지도 않았겠지. 한 사람은 구멍을 막고 한 사람은 저 3개의 뚫어뻥을 번갈아가며 해 본다. 공기압 뚫어뻥은 소리만 멋지다. 최후의 무기. 탄산총알 뚫어뻥을 하는데 시원하게 '뻥'하고 뚫리지 않으니 물이 사방으로 튄다. 결국 옷은 다 젖는다. 두 여자가 물에 빠진 생쥐처럼 축축하게 젖은 채 하수구와 처절한 사투를 벌인다. 문제는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안 뚫린다.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물건이 있다. 바로 '습식 청소기'. 이 순간만큼은 마치 수학 문제 풀다 아이디어가 번쩍 떠오르는 천재 고등학생이 된 기분이다. 일단 위에 고여있는 물부터 빨아들여 보자는 마음이었다.
습식청소기 + 25미터 전기 릴을 총 동원. 전선을 탈의실 거울 옆에서 끌고 오고 물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한다. 1통, 2통, 3통... 20리터 물통을 10번쯤 비우자 드디어 하수구 구멍이 모습을 드러낸다. 구멍 보면서 이런 생각도 들었다.
"이게 하수구인지...내 인생인지.."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된다.
물을 다 퍼낸 뒤, 다시 한 번 뚫어뻥 3총사를 돌린다. 예방 차원에서.
하수구에게 말해주는 거다.
"너, 또 막히면 진짜 가만 안 둔다..."
이날 이후로 그 하수구는 아직도 안 막히고 있다.
언젠가 한번 남편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신은 왜 항상 문제의 원인을 척척 찾아내고 잘 고치는 거야?"
"어떻게 그런 걸 다 알아?"
그는 말했다.
"나도 처음 해본 거야.
하다 보면서 방법을 찾는 거지."
그 말이 예전엔 무책임하게 느껴졌지만 지금은 정확하게 이해가 된다. 모든 일이 그렇다. 다 알아야 시작할 수 있다면, 시작조차 못하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방법이 없어 보여도 시작하면 또 뚫린다. (하수구처럼.)
인생에는 명확한 해답보다 모호한 질문이 더 많다. 모든 문제에 정답을 찾으려다 정작 중요한 타이밍을 놓칠 수도 있다. 때로는 계산된 확신보다, 몸이 먼저 아는 직감이 해답이 된다. 결국 중요한 건 경험이 빚어낸 직감이다.
진정한 탐험은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야를 찾는 것이다
-마르셀 프루스트-
T.M.I 덧붙임)
하수구 뚫는 일 같은 거 하고는 역시 삼겹살이지.
열심히 일한 자, 먹어야지.
자주 가는 삼겹살집에 간다.
쫙쫙 기름기 빼듯 힘들었던 일도 쏙쏙 빠져나가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