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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나쥬르 Sep 15. 2022

14. 미국 취업의 벽

#14. 네 나라로 돌아가


비장하게 마우스 커서가 깜빡이는 엑셀 파일을 들여다보며 내게 물어본다.


“대체 몇 개를 채워야 취업할 수 있을까?”


12월 말부터 만들었던 ‘미국 취업 일지’에는 벌써 200개 이상의 회사 이름과 인터뷰 피드백이 빽빽하게 차 있었다. 나 같은 외국인이 과연 ‘top candidate’가 될 수 있을까? 취업 비자(H1B Visa) 얘기를 꺼내려면 무조건 인터뷰에서 1순위에 올라야 한다. 인터뷰를 잘해서 마지막 라운드까지 올라갔는데, 취업 비자 얘기만 꺼내면 떨어진다는 얘기를 지겹도록 들었다.


미국 취업 과정에서 가장 힘들었던 2가지는

1) 인터뷰를 잘해서 마지막 라운드까지 가는 것

2) 파이널 라운드까지 통과한 후 취업 비자(H1B Visa)를 지원받는 것이었다.


© lykz, 출처 Unsplash

면접 초반부취업 비자 필요 여부를 미리 확인하고, 비자 지원은 어렵다며 인터뷰를 취소하는 효율적인(?) 회사도 보았다. 미국 취업에 실패하는 것은 결코 비자 때문만은 아니다. 취업이 힘든 것은 무수한 미국 현지인과 국제 학생을 제치고, 일자리와 신분을 해결해줄 만큼 나의 경쟁력이 뒷받침해 주지 않아서라는 것을, 시간이 지날수록 뼈저리게 느꼈다. 엄청난 학력이나 운, 인맥이 받쳐주지 않는다면, ‘top candidate’이라는 에이스라도 거머쥐어야, 내가 원하는 패를 꺼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다. 어렵지만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인터뷰를 많이 하다 보면 파이널 라운드까지 가는 기적이 생기고, 취업 비자 얘기를 꺼낼 기회가 생긴다. 꼭 취업 비자 지원을 받지 못하더라도, OPT를 통해 취업하는 방법도 있다. 


OPT의 진실


외국인 학생이 미국 학교를 졸업하면 OPT라는 기회가 주어진다. 미국 학위를 취득한 유학생들이 전공 관련 분야에서 직무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선택적 실습 교육(Optional Practical Training)’ 기회를 제공하는 취업 허가 제도이다. OPT 신청하고 EAD 카드(각주 참고)를 받으면, 짧게는 1년간, STEM 분야 전공자는 3년간 취업할 기회가 생긴다. 원칙적으로는.


© homajob, 출처 Unsplash

‘원칙적으로는’이 붙은 이유는, 학교 동기와 주변 지인들을 보았을 때, OPT로 취직한 케이스가 단 한 명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취업 비자를 신청하는 시점까지 OPT 자격으로 일을 하게 되기 때문에, 미국 취업 시 EAD 카드가 꼭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이 카드가 정작 빛을 발하는 순간은 이럴 때였다. 외국인 친구 중 한 명이 취업 비자 신청서를 넣었는데, 첫해 ‘H1B 제비뽑기’에서 떨어졌다. 그녀는 OPT로 미국 근무 1년을 채운 뒤, 상하이 지사에서 잠시 일하다 두 번째 해 취업 비자 지원에 성공해 미국에서 근무할 수 있게 되었다. 회사가 크고 해외 지사가 있었으니, 운이 좋은 케이스이기도 하다.


언뜻 ‘무용지물’ 같아 보이는 OPT 제도를 대체 왜 실시하나(외국인에게 호의적인 나라로 보이려고?) 의문이 있었지만, 회사 입장을 들어보니 ‘현타’가 왔다. 외국인 직원을 1년 동안 열심히 트레이닝시켰는데, (취업 비자 지원이 힘든 경우) 1년만 근무하고 떠나야 한다면, 회사 입장에서는 ROI(투자 대비 수익률)가 현저히 떨어질 수 있다. 본인이 모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얘기를 듣고서야 왜 OPT로 취직한 외국인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네 나라로 돌아가


엑셀 파일에 지원한 회사 데이터가 200개 넘게 쌓일 무렵, 나는 꽤 많은 온사이트 인터뷰를 했고, 마지막 라운드 결과를 알려주겠다던 회사가 서너 군데 있었다. 3월 초의 어느 날이었다. 리크루터와 첫 번째 인터뷰를 하는데, 목소리만 들어도 나이가 지긋하게 느껴지는 미국 할아버지였다. 이력서와 보직 관련 스킬을 몇 가지 물어보더니, 대뜸 이렇게 질문했다.


이미지 출처: ddengle.com

“한국 사람이 왜 하필 미국 회사에 취직하려고 하니?”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이건 분명 인종 차별적 발언인데...’ 미국 할아버지는 아무 말 대잔치를 이어 나갔다.


“너 같은 외국 애들이 왜 미국에서 취업 비자 따고 취업하려 하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 한국에 일자리가 널렸을 텐데, 네가 필요한 한국에 돌아가 일하는 게 쉽지 않겠냐. 아니면 미국에 있는 한국계 회사에 지원하던가.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택했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가 ‘갑’인 상황에서 대놓고 대들지는 못했지만, 나름 이성적으로 따박따박 대답은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비자 지원 못 해주겠다고 하면 되지, 왜 남의 삶에 이래라저래라 참견이야.’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누가 몰라서 이러고 앉아있나. 한국계 회사도 나름이라, 이미 지원한 한국계 회사들로부터 비자 지원이 힘들다고 통보받았다. 인종 차별로 학교 커리어 센터에 고발해버릴까 싶었다. 그날은 기분을 잡쳐 인터뷰 이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답답한 마음에 엄마께 전화해, 오늘 있었던 더럽고 치사한 사건에 대해 고자질하며, 응석을 부렸다.


“엄마, 미국 취업은 힘든 거 같아. 나 한국에 돌아가면 어떨까...”


잠자리에 누우니, 옷장 위 칸에 모셔 놓은 이사 박스가 눈에 들어왔다.


‘내일부터 그냥 짐 싸?’


외국인 노동자가 정말 미국인 일자리를 뺏는 걸까?


© ninjason, 출처 Unsplash

한동안 미국인의 동양인 혐오(Asian Hate) 사건이 뉴스를 장식했다. 당시 취업의 벽에 가로막힌 많은 외국인 친구들은 이렇게 말했다. “미국인들은 똑똑한 동양인을 싫어하는 것 같아. 본인들 일자리를 빼앗는다고 생각하잖아.” 어떤 이들은 한국의 교육 시스템이 천편일률적이고 상향 평준화되어 있어, 정말 뛰어나지 않은 이상, 눈에 띄기 힘들다고 한다. 모두 ‘한 똑똑’하니까. 반면 미국은 똑똑한 상위 5%가 전 미국 인구를 먹여 살린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미국 회사가 전반적으로 워라밸을 중시하고 행정 프로세스가 느려, 이를 얕보는 농담도 많이 한다. 분명 사실인 부분도 있지만, 내가 경험한 미국 회사는 개인 경쟁력을 매우 중시하며, 법적 신분과 스킬 셋이 받쳐준다면 고용도 쉽게 하지만, 그만큼 해고도 쉽게 한다. 모든 것이 회사의 ‘의지(Will)’에 달려있기 때문이다. 각자도생을 위해 살벌하게 노력하지만, 서로 다양성과 예의를 지켜야 하는 노동법과 정책 하에 겉으로는 매우 평화롭게 보일 수도 있다.


디즈니 애니메이션 <Zootopia>에서 미국 DMV의 느려 터진 시스템을 희화화한 장면


이런 기업 문화에서 외국인이 살아남는 것은 쉬울 수도 있고 어려울 수도 있다. 인종 차별과 다양성에 대한 정책이 철저한 회사에서는 법에 따라 보호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남들과 확실히 차별되는 ‘개인적 역량’이 바탕이 되었을 때이다. 그래서 엔지니어 같은 기술직이나, 동양인의 강점이라 여겨지는 숫자를 다루는 일에서 동양인이 생존할 확률이 높은 것이다.


이곳에서 취업 비자를 받고 법적 신분을 얻은 사람들은, 대단하든 하찮든, 살아남은 이유가 나름대로 하나씩 있다. 출중한 기술력이 있다든가, 인맥이 좋다든가, 서류로 입증할 만한 업적(수상 경력, 국비 장학생 등)이 있다든가. 미국 취업 비자 및 영주권을 신청할 때 제출해야 하는 수많은 서류만 봐도 알 수 있다.


이렇게 자격을 갖추어도, 미국인들은 외국인들을 그리 반기는 것 같지 않다. 따지고 보면 미국은 이민자로 구성된 국가인데, 본인들이 먼저 땅을 밟았다는 이유로 텃세를 부리는 듯하다. 평소엔 외국인 혐오에 별 관심이 없었던 나도, USCIS(미국 이민국) 트위터 계정에 달린 무수한 댓글을 보며, 외국인 노동자가 가져가는 일자리에 대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게 되었다. 어느 곳이나 그렇듯, 미국에는 좋은 사람도 많지만, 트럼프처럼 외노자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점, 겉으로 당신에게 ‘Hi’ 하며 스마일을 날려도 속으론 다른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점을 염두에 두자.


© unseenhistories © thatsherbusiness, 출처 Unsplash


링크드인 키워드의 매직


미국 할아버지의 잔소리가 외국인 혐오에서 나온 것인지, 불쌍한 외국인 지원자를 걱정하는 진심에서 나온 것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Go back to your country!”라며 대놓고 차별적 발언을 하진 않았다. 미국에서 당하는 거의 모든 차별은, 매우 경계선이 모호하고 뉘앙스가 있어, 차별인지 아닌지 알아차리기 힘들다. 당시 나는 전자(외국인 혐오)라고 확신했고, ‘이놈의 할방구, 두고 보자!’ 이를 갈며, 파이팅에 불타올랐다.


© alexbemore, 출처 Unsplash

‘네 나라로 돌아가’ 사건이 있었던 다음 날, 나는 링크드인 프로필 키워드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링크드인에는 구직자가 한 달에 30~50불 정도를 주고 사용할 수 있는 프리미엄 서비스가 있다. 이 서비스를 구독하면, 현재 ‘구직 중’이며 어떤 보직을 찾고 있는지 ‘키워드’를 설정할 수 있다. 일전에는 ‘brand communications, data analytics, social media analyst’ 등 전공에 관련된 키워드만 가득했던 지원자 프로필에 ‘Korean, trilingual, translations, project management, administration’과 같은 전공과는 무관하지만, 나의 강점이 될 수 있는 키워드를 모조리 추가해 넣었다.


목표도 하향 조정했다. 이제부터 나의 목표는 취업 비자를 지원해 주는 보직에 지원해 어떻게든 미국에 남는 것이지, 석사 학위에 걸맞거나 남들에게 내세울 만한 보직에 취업하는 것이 아니었다. 키워드를 넓히고 나니 더 많은 곳에서 연락이 왔다. 확실히 이전보다 승률이 높아진 것 같았다.




이틀 후, 캘리포니아 테크 회사의 리크루터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기본 질문을 몇 개 하더니 나의 경력과 채용하려는 보직에서 요구하는 스킬 셋이 잘 맞을 것 같다며, 회사 및 ‘job description’에 대해 소개해 주었다. 첫 번째 인터뷰가 매끄럽게 진행되었기에 실무자 면접을 보기로 했다.


MBC 아빠! 어디가?

리크루터로부터 연락받게 된 것이 ‘링크드인 키워드의 매직’ 때문이었는지, 그간의 노력이 ‘임계점에 달해서’였는지, 그저 ‘운’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네 나라로 돌아가’ 사건을 이후로 나의 미국 취업 판도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나는 더 파이팅이 넘쳤고, 어떻게 해서든 미국에서 살아남고 싶었다. ‘이놈의 미국 할방구, 어디서 코나 깨졌으면 좋겠다’며 저주만 퍼붓고 앉아있었다면, ‘낙담의 골짜기’에서 주저앉아버렸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겠지.


미국 석사만 취득하면 장밋빛일 거라 생각했던 미래는 여전히 불투명했다. OPT로 취업할 수 있는 기간이 딱 한 달 남은 2월 말이었다. 이번에 취업하지 못하면 짐을 싸 한국에 돌아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봤던 인터뷰와는 느낌이 확실히 달랐다.


‘나머지 인터뷰도 잘 해낼 수 있을까. 과연 이곳에 남을 수 있을까...’


작은 희망을 안고 마지막 인터뷰 준비에 스퍼트를 올렸다.




※ 이미지 출처: Unsplash, ddengle.com 취준생 짤, 디즈니사 Zootopia, MBC <아빠! 어디가?> 짤


※ 용어 풀이:

- OPT(Optional Practical Training): 선택적 실습 교육

- EAD(Employment Authorization Document): 고용 허가증

- 온사이트 인터뷰(On-site interview): 회사 사무실에서 면접관과 마주 앉아 진행하는 면대면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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