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사랑 되갚아 줄 시간

[chapter 3 하나씩, 하나씩 돌아오는 마법같은 시간]

by 이진규


병원으로 향하는 길 위에서의 기분은 언제나 오묘하다.

누구나 기대와 걱정이 버무려진 마음을 품고, 빛과 어둠이 등을 맞대고 있는 하얀 건물 안으로 겸허히 발걸음을 내디딘다. 환자의 어둠을 제일 먼저 마주한 이는, 그 어둠을 들키지 않으려는 듯 하얀 옷을 두르고 환자 앞에 선다. 어둠을 품고 있지만 빛을 바라는 이와, 빛을 두르고 있지만 어둠을 이야기하는 이가 만나는 곳, 그곳이 바로 병원이다.


간만에 누나 손을 잡고 집을 나섰다. 오늘로 벌써 세번째 서울로 향하는 길이다. 병원 로비의 반들거리는 대리석 바닥에 발을 들이는 순간, 가슴이 뭉클해진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개선장군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팔다리를 끌며 터덜거리던 지난 날이 스쳐 지나간다. 시끌벅적 웃음소리가 가득했던 로비에서, 그들의 활기찬 모습이 한없이 부러웠던 기억도 선명하다. 그 곳에 내가 돌아왔다. 뚜벅뚜벅, 내 두발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누가 보아도 나는 이제 평범한 사람이다.


진료실 앞 대기실은 마치 택시 승강장 대합실 같았다. 순서를 기다리며 빼곡히 앉은 사람들 사이로, 시계를 초조히 바라보는 사람, 나보다 늦게 온 사람이 먼저 들어갔다며 언성을 높이는 사람, 길어지는 기다림에 보채는 아이를 달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각자의 사연을 품은 사람들이 그렇게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멀리서 오느라 고생했다. 이제 잘 보이냐?”

“네, 교수님. 오랜만에 뵙네요.”


진료실 문을 열자, 교수님은 반가운 미소로 맞아주셨다. 명절에 모인 가족처럼 진료실 공기는 훈훈했다. 교수님은 내가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여전히 신기하신 듯했다. 나는 일어나 똑바로 걷고, 질문에 또박또박 대답하며 그간의 성장을 보여드렸다. 교수님은 “거의 죽어가는 놈 숨만 겨우 붙여 놨는데..."라고 중얼거리리며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너 이제 내년에 봐도 되겠다. 우리 이제 자주 보지 말자.”

“네, 교수님. 건강하세요.”


병원에도 졸업이 있었다. 크고 작은 졸업을 많이 해왔지만, 이번이 가장 뿌듯하고 기분 좋은 졸업이었다.


미울수록 정든다는 말처럼, 진짜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더 아쉬웠다. 떠나기 전, 지긋지긋했던 재활치료실에 찾았다. 매일 땀 흘리며 낑낑대던 그 때의 나를 만나고 싶었다. 다 나아서 왔다고,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래야 진짜 졸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곳은 여전히 전쟁터였다. 꿈쩍 않는 병마와 지난한 싸움을 이어가는 환자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땀 흘리며 사투를 벌이는 의료진들이 한 몸처럼 움직이는 숭고한 곳이었다.


“오, 대박! 이진규님 오셨네요!”


입구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자, 익숙한 얼굴의 물리치료사 선생님들이 미소로 나를 맞아 주셨다. 반가운 전우 같았던 그들과 그간의 이야기를 나누며 웃음이 번졌다. 꾸벅꾸벅 졸며 블록 쌓기 연습을 했던 작업 치료실, 매일 대본을 쓰고 읽었던 언어치료실까지 천천히 돌며 추억을 떠올렸다. 곳곳에서 달라진 내 모습을 축하해주는 목소리에 마음이 뭉클해졌다.


집으로 내려가는 버스 안, 상기된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며 그동안의 일들을 찬찬히 헤아려본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사고가 났던 그 날부터 지금까지, 상상조차 못했던 일들의 연속이었다. 웃는 날보다 우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런 날들이 있어서 오늘도 웃을 수 있었다. 기쁨도 슬픔도, 행복도 좌절도 모두 그렇게 흘러갔다.


창 밖으로 스쳐가는 풍경처럼, 그들 역시 내게 손 흔들며 인사하고 있다. 이제는 떠나 보내줄 때가 되었다. 마음 속으로 조용히 속삭였다.


‘나, 이제 나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집에 돌아와 병원에서 썼던 일기장을 꺼냈다. 웃음꽃처럼 화사했던 지난날들이 그곳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바쁜 시간을 쪼개어 나를 찾아와 준 한 사람, 한 사람의 정성이 떠올라 눈물이 날 만큼 고마웠다. 그 정성들이 모여 나를 웃게 했고, 뛰게 했고, 살게 했다. 이제는 내가 고마움을 전할 차례다.


“은혜를 갚으려면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낫다”는 말처럼, 전주에서 유명한 빵집에 들러 여럿이 함께 나눠먹을 수 있도록 초코파이 한 꾸러미를 샀다. 양 손 가득 선물세트를 들고 결초보은 여행길에 올랐다. 목적지는 서울, 그리고 포항이었다.


사고뭉치 신입 인턴이 고향에 돌아왔다. 반가운 소식에 연구실 식구들은 실험용 비커와 피펫을 내려놓고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응급실에 실려갔을 때부터 내 상황을 샅샅이 알고 있던 그들은 신기한 듯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진규, 너 이제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중환자실에서 진짜 장난 아니었는데...사람이 이렇게 멀쩡해져서 돌아올 수가 있나?”


나는 마치 동물원에 새로 들여온 원숭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를 둘러싼 그들에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시작으로 눈이 떠진 순간부터 둘로 보이던 물체가 하나로 보이던 순간까지 신나게 만담을 늘어놓았다.


장소만 병원에서 연구실로 바뀌었을 뿐, 그들은 그대로였다. 여전히 고마웠고 한없이 따뜻했다. 내가 주려고 갔는데 되려 받고 왔다.


서울에서 포항까지는 시외버스를 타고 달리면 다섯 시간이 걸린다. 멀고도 긴 여정이지만, 고향에 향하는 길은 언제나 설렘으로 가득하다. 나에게 포항은 제2의 고향 같은 곳이다.


고등학교 시절의 미숙함을 벗어 던지고, 이제 막 알에서 깨어난 듯 새로운 날개를 펼치려 했던 20대 초반의 순수함이 가득했던 곳이다. 눈 앞에 펼쳐진 세상은 눈부셨고, 끝없이 낯설었지만, 나는 조심스레 날개를 펴고 하늘을 꿈꾸곤 했다.


다시 찾은 포항의 얼굴은 몇달 전 졸업식에서 보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서늘한 겨울 바람과 매서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그날의 포항은 마치 얼어붙은 내 마음을 그대로 비추는 듯 아프고 고요했다.


그러나 오늘의 포항은 달랐다. 선선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따스한 햇살이 부드럽게 내려앉아 있었다. 마치 살아 숨 쉬는 듯한 온기가 나를 감싸 안으며 새로운 생기를 불어넣어주는 듯했다. 이 녀석도 내 아픔을 함께 느끼며 울어주었고, 이제는 다 나은 내가 반갑다며 따스하게 맞아주는 것 같았다.


“니 살아서 왔네? 병원밥 맛있었나?”

“진규야, 너 소식 듣고 엄청 울었어. 못 가봐서 미안해.”


후배 기숙사에 머물며 이박삼일 동안 캠퍼스에서 지냈다. 그동안 나를 찾아온 사람들 속에서 다시금 소중함을 느꼈다. 병문안 와주었던 죽마고우 동기 형부터, 내 입원 소식을 전해 듣고 돌아가신 할머니가 떠올라 한참동안 눈물을 흘렸다는 친구까지.


졸업식에서의 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지만, 실례가 될까 말을 걸지 못했다던 후배도 있었다. 병문안을 꼭 가고 싶었지만, 사정상 가지 못해 아쉬웠다고 말하며 미안하다는 선배도 있었다. 그들과 함께한 시간은 짧았지만, 그 안에는 진심 어린 마음들이 가득 차 있었다.


졸업은 새로운 시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졸업이라는 끝을 뒤집으면 곧바로 새로운 시작이 손을 내민다.


나는 오늘, 포항에서 한 번 더 졸업했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시작했다. 모든 것이 시작되었던 이 곳에서, 열아홉 철없던 내가 대학 정문을 처음 밟던 그날처럼. 익숙하면서도 낯선 설렘 속에서, 다시 한번 인생의 첫발을 내디뎠다.


사람은 아프다고 죽지 않는다. 큰 사고를 당해서도, 불치병에 걸려서도 아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에게서 잊혀 졌을 때, 사람은 진정으로 죽는다. 누군가의 마음속에 기억으로 남아 있고, 그 사랑이 이어지는 한 그 사람은 결코 죽지 않는다.


나는 서울에서도, 포항에서도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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