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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진민 May 01. 2019

탄생, 아기와의 만남

사르트르, 칸트, 하이데거, 그리고 아렌트

아기의 탄생이 갖는 의미에 대해 언급한 철학자들이 꽤 있다.

나는 그중에서 아렌트(Hannah Arendt)의 이야기를 가장 좋아한다.

왜 아렌트 할머니의 얘기가 가장 좋은지 설명하려면, 상반되는 관점을 가졌던 할아버지들 얘기부터 꺼내는 게 좋을 것 같다.


아기의 탄생: 사르트르, 칸트, 하이데거


사르트르나 칸트, 하이데거는 탄생의 '비자발성' 혹은 ‘강제성’에 밑줄을 긋는 편이다.

“왜 맘대로 절 낳으셨나요.” 같은 거랄까.

완규형 새 노래 좀 내줘요

사르트르 같은 경우, 탄생한 자가 스스로 요구하지도 않은 탄생은 자유에 대한 일종의 ‘스캔들’이라고 한다. 그럴 생각 없었는데 처음부터 남에 의해 시작하게 된 인생이라니. 인간의 자유의지를 생각할 때 이건 시작부터 엄청난 스캔들이라는 이야기다.


칸트 역시 아기의 출생은 한 인격체를 동의 없이 멋대로 세상에 들어오게 한 행위라고 본다. 재미있는 것은 태어날 때 내는 울음소리를 첫 자발성의 표현이자 자유의 외침이라고 보는 것.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애응애 우는 건 내 동의도 없이 왜 날 낳았냐는 항의라는, 시 신선한 발상이다. 칸트가 궁극적으로는 부모의 책임과 의무를 강조하기 위해 이런 밑밥을 까는 것이지만, 어쨌든 아기의 출생 자체는 강제, 부당함, 분노 같은 부정적 단어들로 그려진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우리는 모두 세상에 ‘내던져진 존재’(geworfenes Sein)들이다. 전적으로 무력하게 세상에 내던져진 채로 생을 시작한다.  

종합하자면, 이 세 철학자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탄생을 '멋도 모르고 세상에 내던져지는 행위'로 본다.

세상에 덩그러니 내동댕이쳐진 갓난아기.

내동댕이 ⓒ MBC (마이 리틀 텔레비전)

아기의 탄생: 아렌트


이에 반해, 아렌트의 시각은 아름답고 경이롭다.

아렌트에 따르면, 인간은 누구나 이 우주를 새로이 출발시키며 탄생한다고 한다. 한 인간이 새로 태어날 때마다 우주는 새롭게 출발한다는 것이다. 새로운 우주를 출범시키는 기적 같은 능력이 신뿐만 아니라 우리 인간에게도 있다는 말이다. 창조주가 인간을 창조했듯이, 제2의 창조자인 부모들도 신의 창조를 본받아 자신의 아이들을 창조한다.

신이 창조한 기적, 인간.

부모가 신을 본받아 창조한 기적, 아이. 


서양철학이 대체로 ‘죽음’과 ‘사유’를 중심으로, 즉 언젠가 ‘죽을’ 운명으로서의 인간에 대한 ‘사유’에 몰두해 왔다면, 아렌트는 대조적으로 ‘탄생’과 ‘행위’를 철학의 중심에 두었다. 이렇게 '탄생'한 인간들이 '행위'를 통해 이 우주를 변화시킨다. 그래서 그녀에게 탄생이란 귀하고 아름다운 시작이다.


이전에는 없었던, 그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자로서 이 세상에 새로 온 존재들.

생각해보면 엄청난 일이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태어났던 모든 사람이 전부 제각각 다른 사람들이라니!(도플갱어라든가, 윤회는 잠시 접어두자.) 그렇기에 우주는 한 인간의 탄생을 기점으로 새롭게 출발하는 것이다. 아렌트의 인간은 “새로 시작하는 자”들이다.  

그러니까 이런 것들은 잠시 접어 두자. 윤회라 하더라도 (쿨럭) 엄연히 다른 시공간을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이다. 나 지금 뭐라는 거냐.

부모는 이 세상에 유일무이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누구와도 대체할 수 없는 또 다른 누군가를 자식으로 탄생시킨다. 시작이 시작을 낳고, 우주는 온통 새로운 시작들로 가득하다. 사르트르나 칸트의 논의를 딱히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의 탄생에 관한 아렌트의 이야기는 참 매력적이다.


그래서, 아렌트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나에게 아기의 탄생이란 뭔가 우주적인 이벤트였다.

이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명이 나를 통해 이 세상에 놀러 오는 것.

나의 우주가 새로운 우주를 만나는 것.

이 세상이 내 아이의 탄생을 통해 또 새로운 우주로 재탄생되는 것.

왜 자꾸 저를 찾으시는 거죠... (드라마 <SKY 캐슬>의 우주. 혹시 못 보신 분들을 위해 저의 친절함을 발휘해 봅니다.)

첫 눈 맞춤, 우주적인 이벤트


첫아이가 처음 나를 응시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기가 태어난 지 만 사흘이 지났을 때였다. (왜 사흘이나 지났냐고 한다면, 갓 태어난 아기들은 대체로 눈을 잘 못 뜬다. 강아지들이 눈 뜨는 데 한참 걸리는 것처럼.)

퇴원해 (그렇다. 수술했지만 사흘 만에 퇴원한다.) 집에 돌아와 소파에서 오후 햇살을 받으며 아기를 안고 있는데, 그 맑고 검은빛으로 주의 깊게 나를 응시하는 아기의 눈.

내 안에 들어있던 아이가 밖으로 나와 처음으로 나와 눈을 맞추고 그 깊고 검푸른 눈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을 때, 나는 말 그대로 우주의 경이로움을 느꼈다.

아렌트가 말했던 새로운 우주가, 그 약간은 안개가 서린 듯했던 작고 검은 눈동자에 들어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시간이 멈추고 세상에 나와 이 아이만 존재하는 것 같던 마법의 시간.

고요한 가운데 화선지에 먹이 번지듯이 잔잔히 번져나가던 행복감.

무슨 생각을 하며 엄마 얼굴을 쳐다본 걸까.

내게는 세상 그 어떤 눈길보다 강렬하고 기억에 남을 눈빛이었다.

(물론 얼마 후, 갓 태어나 눈을 뜬 아기의 시신경으로는 엄마를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조금 실망했다. 엄마를 한참이나 지그시 바라보던 그 안개 같은 눈빛을 내가 얼마나 마음 깊이 담아뒀는데. 때로는 세상 모든 것을 과학적으로 꼬치꼬치 밝히지 않아도 좋은 법이다.)

 Marc Chagall <I and the Village> ⓒ a little teapot

* 마크 샤갈(Marc Chagall)의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이라는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샤갈이 일부러 눈 맞춤을 강조하기 위해 눈 사이에 그려 넣은 선이 보인다. 아기와의 그 인상적인 눈 맞춤 이후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림. 미술관에 갈 때마다 가장 마음에 남았던 그림을 엽서나 자석으로 사 오곤 하는데, 뉴욕 MoMA에 갔던 날은 저 흐릿한 선이 가장 또렷하게 내 마음을 끌었다.


불안과 위로를 동시에 주는 신기한 존재


갓 태어난 아기는 놀랄 만큼 작고, 놀랄 만큼 부드럽다.

이렇게 조그만 인간이 있다니.

그런데 그 작고 약하고 부드러운 아기가 산모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는지 모른다.


Baby blue.

산후우울증까지는 아니고, 첫아이를 낳고서 한 사나흘 정도 가벼운 우울감 같은 것이 있었다.

호르몬 때문인지 이유 없이 그렇게 눈물이 났다.

아이가 이렇게 작고 예쁜데 세상이 너무 험해서 어쩌지. 이렇게 예쁜 아기가 혹시 아프거나 잘못되면 어떻게 되는 걸까. 이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눈물이 줄줄 흘렀다.

지금 보면 이런 걸로 뭐 눈물씩이나 싶지만, 그때는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민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아닌 일에 눈물이 흘렀다.

이렇게 힘들고 험한 세상에 이렇게 나약한 존재를 낳아놓고 그 존재를 가슴 깊이 사랑하는데서 오는 불안감.


그런데, 아기를 안으면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고 가슴이 따뜻해졌다.

갓 태어난 아기의 그 믿을 수 없는 보드라움도 좋았고, 기저귀에 분 냄새 같은 것이 덧입혀져 있어 안으면 정말 좋은 냄새가 났다. 목덜미에서 나는 예쁜 아기 냄새가 코에 폭 와 닿으면 마음이 풀어지고 미소가 났다.


아기 때문에 눈물이 나는데, 그 아기 때문에 또 위로를 받는 아이러니한 상황.

그런데 평생 이런 아이러니가 지속될 것 같기도 하다.

가장 눈물을 주는 것도, 가장 위로를 주는 것도 아마 너희들이 되지 않을까.


그렇게 아기를 만난 나는 울며 웃었다.

그리고 평소 나답지 않게 자꾸 질질 짜는 내 모습을 본 언니는, 같이 장 보러 나갔다가 옆길로 새서 나에게 이런 자석을 선물로 주었다.

헿헿헿 ⓒ a little teapot

미국의 산모용 식사와의 만남


그런데 새로운 만남은 이게 다가 아니었다.

또 하나의 우주적인 만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미국의 산모용 식사와의 만남.


구성을 한 번 보실까요.

산모의 치아 건강을 생각하여 특별히 약간 질긴 식감의 바게트를 사용한 오픈 샌드위치(라고 쓰고 빵 쪼가리라고 읽는다)에 토르텔리니 수프, 질소 듬뿍 감자칩, 혈당이 쑥 치솟을 거대 초콜릿 쿠키, 여기에 화룡점정, 바닐라 아이스크림으로 마무리.

엄마가 먹지 말라는 것들만 특별히 골라놓은 것 같은 이 아름다움.

사진을 여고시절 친구들이 모인 단톡방에 올렸더니, 대체로 육아 선배인 친구들은 아이스크림이 나온다는 사실에 특히 웃음과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산모가 금방 건강을 회복할 것만 같은 보양식 세트 ⓒ a little teapot

그런데 사진 뒤의 진실을 말하자면 실은 저건 내가 선택해서 주문한 메뉴였다. 미국에는 산모용 식사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서 그냥 일반 환자들과 똑같은 병원식을 산모들도 함께 먹는다.

입원 첫날 메뉴판을 받았는데(누가 나한테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냐고 물으면 메뉴판이라고 대답한다. 늘 나를 설레게 하는 유일한 책.) 매 끼마다 메인 메뉴와 사이드 메뉴, 디저트를 선택할 수 있었다. 아침엔 팬케이크와 오믈렛, 머핀, 프렌치토스트 등에 과일과 그래놀라, 요거트가 나오고 사이드 메뉴로는 스크램블드 에그, 감자나 소시지 류가 나왔다. 점심과 저녁은 메인 요리(닭가슴살 샐러드나 소스를 얹은 에그 누들, 고기 야채 덮밥 같은 것)에 야채나 수프가 곁들여지고 디저트가 나왔다. 사진 속의 저 구성이 특히 놀라워서 그렇지 사실 식사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애 낳은 다음 날 저런 메뉴를 골라도 "굿 초이스!" 라며 웃으며 가져다주는 병원 스태프들은 아마 우리나라에서 보기 힘들 것 같지만.


언니와 남편이 부지런히 따끈한 미역국이며 맛있는 죽, 만두나 당귀차 같은 것을 날라다 주었기 때문에 사진 속의 식사는 사실 식사 시간에 놀러 올 가족들을 염두에 두고 고른 메뉴였다. (하지만 내가 옆에서 안 먹었을 리는 없다. 진실을 말하자면 아이스크림이 몹시 맛있었다.) 대왕 쿠키와 바닐라 아이스크림은 엄마를 보러 놀러 올 첫째 아이에게 줄 선물이었고, 남편이 혹시 먹을까 해서 샌드위치를, 맥주를 무슨 보리차 마시듯 하는 언니를 위해 미니 칩을 시켜 놓았던 거였다. 수프는 내 것. 호로록 먹었는데 따뜻하고 맛있었다. 따끈따끈한 신상 형아가 된 첫째가 놀러 와서 동생을 보고 신기해했다. 그리고 대왕 쿠키에 수줍어하며 큰 기쁨을 표시했다.  


내 병실에 들르는 간호사들은 당귀차 냄새를 좋아했고 (어메이징 하게 좋은 냄새가 난다며 아로마 오일이냐고 물었다) 저 쪼끄만 동양 여자가 맨날 우물우물 먹어대는 해초가 가득한 수프는 뭔지 궁금해했다. 우리 문화에서 왜 산모들이 미역국을 먹는지 설명해 주면 신기해하고 재미있어했다. 그리고 나는 미국에서의 출산이 누릴 수 있는 통 큰 혜택이라고 생각하며 매 끼마다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주문해 먹기를 즐겼다. 흐흐.


그렇게, 내 세상에 아기가 옴으로써 새로운 우주가 펼쳐졌다.

I am your MOTHER. ⓒ a little teap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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