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한 가전회사에서 신제품 출시 시기를 두고 부서 간 의견이 팽팽하게 맞섰어요. 영업팀과 마케팅팀은 시장 선점을 위해 빠른 출시를 주장했지만, 개발팀과 생산팀은 촉박한 개발 기간과 품질 관리 문제를 이유로 반대했어요. 각 부서의 주장은 모두 일리가 있었죠. 그렇기에 이를 총괄하는 사업부장 역시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했어요. 그 사이 신제품 출시는 기약 없이 늦어지고 있었어요. 결국 회사 대표가 직접 나서 신제품 출시 시기를 일방적으로 결정하면서 이 논의는 마무리되었어요.
많은 조직이 이처럼 의사결정에 어려움을 겪어요. 어떤 경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정에 주도권을 가지려 하고, 또 다른 경우에는 서로 눈치 보느라 아무도 결정을 내리지 않으려 해요. 그런 상황에서는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결론이 나지 않아요. 회의 때마다 같은 주장이 반복되면서 피로감만 쌓이게 되죠. 결국 상위 리더가 직접 개입해 해결하는 방식으로 귀결되지만, 이는 효과적인 방법은 아니에요.
: 베인앤컴퍼니의 RAPID 모델
효율적인 의사결정은 명확한 역할 분담에서 시작돼요. 책임과 권한이 뚜렷해야 갈등과 혼란을 줄일 수 있어요. 또한 중복이나 공백 없이 실행력을 높일 수도 있고요.
글로벌 경영컨설팅사 베인앤컴퍼니(Bain & Company)는 의사결정 과정에서의 역할 분담 방법론으로 RAPID 모델을 제시해요. [1] RAPID는 추천(Recommend), 승인(Agree), 실행(Perform), 의견제공(Input), 최종결정(Decide) 5가지 역할에 대한 약자예요. 각 역할은 아래와 같아요.
1. 추천자(Recommend, R)
관련 의견을 모아 최종 결정권자를 위한 제안을 만드는 역할이에요. 의사결정의 맥락, 시기, 기준 등을 최종 결정자와 사전에 조율하는 역할도 포함해요. 보통 각 결정마다 한 명의 추천자를 지정해요. 그렇기 때문에 결정자를 포함한 다른 참여자들로부터 모두 신뢰를 얻는 담당자 혹은 부서가 그 대상이 되는 경우가 많아요.
2. 승인자(Agree, A)
최종 제안이 결정권자에게 전달되기 전에 합의하는 역할이에요. 주로 실행 가능성이나 법적·규제적 요구사항을 검토하며, 필요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어요. 승인자의 합의 없이는 제안이 진행될 수 없어요. 그렇기에 의사결정 초기 단계부터 추천자와 협력해 실행 가능한 제안을 만드는 데에 적극적으로 기여해요.
3. 실행자(Perform, P)
결정이 내려진 이후 실제로 실행을 책임지는 역할이에요. 보통 의사결정 초기부터 참여하여 의견을 제공하고 관련 정보를 공유받아요. 의사결정의 의도와 맥락을 이해함으로써 추후 실행 성과와 속도를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에요.
4. 의견제공자(Input, I)
전문 지식, 경험, 정보를 제공하며 추천 안을 구체화되도록 돕는 역할이에요. 결정의 영향을 받거나 실행에 관여할 사람들도 포함돼요. 시의적절하고 신뢰성 있는 정보 제공을 통해 의사결정 품질에 큰 영향을 줄 수 있어요.
5. 최종결정자(Decide, D)
최종 결정을 내리고 조직이 실행하도록 하는 권한을 가진 사람이에요. 단순히 결정을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의사결정의 기준과 절차를 정하는 등 전체적인 틀을 제시하는 역할이에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기 때문에, 결정 이후에도 필요한 커뮤니케이션과 자원 확보도 담당해요.
위 5가지 역할이 진행되는 순서는 아래 도식과 같아요. 먼저 정보가 모이고(I), 제안이 구체화되며(R), 유관 부서의 합의를 받아(A), 결정이 이뤄지고(D), 이후 실행(P)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추가로, 필요한 참여자 중심으로 역할 배분할 때 더 효율적인 진행이 가능해요. 예를 들어, 최종 결정권자가 두 명 이상이 되면 합의가 어려워질 수 있어요. 또한 거부권을 행사하는 승인자 역시 두 명 이상 존재하게 되면 제안서 개발에 보다 오랜 시간이 소요될 가능성이 높아요. 마지막으로 의견 제공자가 너무 많으면 정보 취합에 소요되는 시간 역시 지나치게 많아질 수 있어요. 따라서 아무리 중요한 결정이라도 의사결정의 효율적 진행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참여자를 중심으로 역할을 배분하는 것이 중요해요.
앞서 소개한 가전회사 사례도 RAPID 모델을 적용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 거예요. 예를 들어, 추천자(R)를 마케팅팀으로 지정해 시장 진입 전략을 제안하게 하고, 승인자(A)로 생산 부서를 지정해 품질과 일정의 현실성을 검토하도록 했을 수 있죠. 또 의견제공자(I)에는 영업팀과 개발팀을 포함해 시장 반응과 사후 관리 리스크를 반영하도록 할 수도 있었어요. 마지막으로 최종결정자(D)를 대표이사가 아닌 사업부장으로 지정했다면, 갈등이 길어지지 않고 실행 가능한 일정으로 결론이 났을 가능성이 높아요.
단순히 결정을 서두른다고 해서 빨라지는 것은 아니에요. 의사결정이 늦어지고 갈등이 커지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역할이 불분명하기 때문’이에요. 효과적인 의사결정은 적절한 사람이 명확한 역할을 맡고 책임 있게 실행할 때 가능해요. 역할이 분명하면 속도도 빨라지고 실행력도 강화되고요. 변화가 큰 환경일수록 조직이 유연하게 움직이려면 모순적이게도 이런 체계적 접근이 더 중요해요.
[1] Bain & Company. (2023, October 13). RAPID® decision making. Bain & Company. Retrieved [2025.9.4] from https://www.bain.com/insights/rapid-decision-mak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