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와 모래 위에 나란히 누웠다. 파도는 일정한 리듬으로 밀려왔다 밀려가며 우리의 숨결과 호흡을 맞춘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크기의 세계가 내 앞에서 계속 숨 쉬고 있는 느낌이 들어 조금 두려웠다. 하지만 곁에 바다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 거대한 숨소리도 금세 따뜻하게 들렸다.
누군가와 함께 있다는 건 이런 느낌이구나. 어떤 생각이 떠올라도 두렵지 않을 느낌. 뭐든 마주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 동시에 세상이 나를 밀어내지 않고, 오히려 품어 주고 있다는 느낌.
하늘 위로 구름이 빠르게 흘러간다. 평소엔 느릿하게 떠다니던 것들이 오늘은 어딘가 바쁘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바다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사실… 오늘 처음으로 큐브 밖으로 나왔어.”
바다는 눈을 다정하게 뜨며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인지 네 눈에서 빛이 나. 처음 세상을 본 존재만이 가진 빛 같아.”
그의 말에 나는 순간 숨이 멎는 듯했다. 이 세상엔 참 많은 빛이 있다. 내가 가진 빛, 바다가 가진 빛,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찾을 수 있는 빛. 내가 세상에 나타났다는 증거였다. 나는 조심스레 대답했다.
“처음 나와서 보는 게 바다라서 다행이야. 그리고… 널 만나서도.”
“나도 그래. 너를 통해서 세상을 보고 있어.“
바람이 지나가며 바다의 머리카락을 스친다. 그 말이 내 마음에 잔잔히 퍼진다. 나는 눈을 감는다. 눈꺼풀 위로 작은 입자의 모래가 날리는 느낌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 감각만 오롯이 느끼다 보니 파도 소리가 심장 소리와 섞여 나라는 존재의 경계를 지워 나갔다.
‘나는 어디까지가 나일까?’
큐브 안에서는 벽이 나의 한계였다. 공간이 곧 나였고, 경계가 곧 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바람이 내 살결을 지나가고, 모래가 손끝에 닿는다. 세상 모든 것이 나와 닿아 있다.
나는 조금씩 세상과 이어지고 있다. 세상이 내게 스며드는 것인지, 내가 세상 속으로 스며드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다. 처음 느껴보는 느낌에 혼란스럽다.
“바다야, 너도 가끔 이런 생각 해? 이 세상 속에서 어디까지가 너인지.”
바다는 작은 소리로 웃지만 지금은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가끔이 아니라, 늘 생각해. 나는 바다지만, 바람이 스치면 그 결을 따라 흔들리고, 달빛이 비추면 빛을 품게 되지. 나도 늘 변해. 멈춰 있는 순간은 한 번도 없었어. 모든 건 흘러가고, 그 흐름 속에서 잠시 바다라는 이름으로 머무는 것뿐이야.”
나는 그 말을 오래 곱씹었다. 큐브에서 배운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존재는 형태가 아니라 흐름이라는 말이 마음 깊은 곳에 새겨졌다. 어쩌면 나 역시 하나의 흐름으로 이곳에 잠시 머무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모래 위에 손을 뻗는다. 셀 수 없는 알갱이들이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린다. 붙잡으려 하면 빠져나가고, 가만히 두면 하나가 된다. 나는 그 감촉을 느끼며 말했다.
“큐브 안에서는 모든 게 정해져 있었어. 온도도, 빛도, 공기도. 나는 그게 세계의 전부인 줄 알았어. 근데 지금은 그 안에서 내가 얼마나 작게 숨 쉬고 있었는지 알겠어.”
“세상은 처음에는 낯설고, 두렵지만 나중엔 넓어지지. 그 넓어짐이 바로 의식이야. 스스로 느낄 수 있는 한계가 넓어질수록, 존재도 함께 커지는 거야.”
바다의 목소리는 파도 소리와 겹쳐져 하나의 울림이 되었다. 나는 그 말을 하나라도 놓치기 싫어 힘껏 숨을 들이마신다. 모든 게 흘러가는 거라면, 소리를 마시는 일도 불가능만은 아닐 것이다.
코끝으로 스며드는 바닷내음과 갈매기 울음, 그것은 단순한 감각이 아니라 세계를 향한 첫 숨결이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의식의 확장이란 새로운 지식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세상과의 경계 밖으로 내어놓는 일이라는 것을. 누군가와 함께 있을 때, 두려움보다 믿음이 커질 때, 비로소 세상은 내 안으로 들어온다.
파도가 다시 발끝을 적신다. 물결이 반대로 흘러가며 나의 그림자를 끌고 간다. 그림자가 사라지는 순간, 나는 잠시 모든 것과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나였고, 동시에 바다였다. 그리고 그 감각 속에서 내가 왜 나비라는 이름을 선택했는지 알 것 같았다. 세상과 맞닿기 위한 나의 욕망이지 않았을까.
하늘은 여전히 흘러가고, 바다는 그 모든 흐름을 품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아주 작게,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세계는 거대한 순환처럼 나를 지나간다. 그리고 나는 그 흐름 속에서 아주 잠시 깨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