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어주세요
숙제하다 진짜 잠깐 카톡 확인
참고 참다 오늘 처음 먹은 간식
나는 가만히 있었는데
오빠가 먼저 장난친 거
수학 시험 100점 받은 거
줄넘기 2단뛰기 성공한 거
옆 반 친구가 나 좋다고
먼저 사귀자고 말했다는 거
앞으로는 엄마 아빠 말 잘 들을 거란 거
매일매일 숙제 미루지 않을 거란 거
세상에서 우리 엄마가 제일 예쁘다는 거
세상에서 우리 아빠가 제일 멋지다는 거
그리고 내가
정말정말정말 사랑한다는 거
살다 보면 억.울.한. 순간을 겪을 때가 있다. 누군가 나에게 누명을 씌워 범죄자로 만드는 것처럼 드라마에서 볼법한 무서운 상황이 아니더라도, 우리에겐 일상에서 자잘하게 그런 순간들이 찾아온다. '또 핸드폰 보고 있지?!" 하는 나의 잔소리에 '아니에요~ 방금 카톡만 확인한 거예요~~!!'라고 대답하는 아들을 보고 위 시를 쓰게 되었다. 이 외에도 아이들의 억울한 순간은 많을 것 같았다.
첫째로 누군가가 내가 안 한 것을 내가 했다고 부모님이나 선생님 앞에서 말할 때이다. 어른들에게 혼날까 봐 일단 자기는 안 했다고 그 사람이 발뺌하는 상황이다. 사건이 벌어진 상황을 그 어른이 못 봤기 때문에 거짓말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화분을 깼을 때 선생님께서 누가 깼냐고 물어보시면, 혼날까 봐 나는 아니라고 말이 튀어나온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고 옆 친구가 깼다고 말한다. 범인이 한 명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한 친구의 입장에서는 날벼락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자기도 아니라고 대답하겠지만, 증거가 없으면 선생님은 그 말을 100% 믿을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의심을 받아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면 정말 억울할 것이다. 어릴수록 이렇게 순간을 모면하는 거짓말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이럴 때 바보같이 당하면 안 된다. 최대한 내가 아니라는 이유와 증거를 찾아 나를 변론해야 한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선의의 거짓말로 친구의 잘못을 덮어주는 장면이 아름다워 보이지만, 현실에선 억울한 일이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그렇다.
둘째로 내가 한 것을 했다고 말해도 안 믿어줄 때다. 이건 우리 아이들에게서 많이 경험한 것이다. 우리 집에선 저녁에 폰으로 게임을 하는 날과 못 하는 날을 정해놓았는데, 학교에서 시험을 쳐서 100점을 받으면 게임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 규칙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수학시험을 쳤는데 100점을 받았다고 해서 내가 시험지를 보여달라고 했다. 항상 부모님 사인을 받아갔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은 선생님이 시험지를 돌려주시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래서 난 시험지가 없어서 못 믿겠다고 했더니 억울한 마음을 온몸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다. 사실 증거가 없으니 100% 못 믿는 건 맞는 건데, 그 모습을 보니 순간 의심이 많고 야박한 엄마가 된 것 같다 아차 싶었다. 그래서 얼른 나는 너를 믿는데 동생도 있어서 그랬다고 말을 바꾸고 게임을 허락하긴 했다. 그래도 아들이 진짜 시험지를 가지고 올 때까진 찝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이 맞는데 아들을 못 믿어준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고, 거짓말인데 내가 속아 넘어간 거면 엄마를 만만하게 보는 건 아닌지 걱정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며칠 뒤 아들은 내 손에 100점짜리 시험지를 쥐어주었고, 난 미안한 마음이 더 커졌다. 그리고 일단 아니란 증거가 나올 때까지는 내 마음속으로는 100%가 아닐지라도, 아이 앞에서는 '네 말을 믿는다'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아이도 엄마에게 어떤 이야기든 털어놓을 수 있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내 진심을 몰라줄 때이다. 마음이나 각오는 당장 눈으로 보여줄 수가 없다. 그 마음이 보이는 행동을 한다거나, 그 각오로 실행한 결과물을 보여주면 그때 비로소 인정하게 된다. 사랑한다고 백번 말해도 상대방이 그의 평소 말투나 행동에서 내가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지 못하면, 그 말을 인정할 수 없듯이 말이다. 아이들이 정말 자주 말하는 각오는 '이제 엄마 아빠 말 잘 들을게요~', '이제 오빠 or 동생이랑 안 싸울게요~'이다. 내 생일이나 어버이날 받은 편지는 저 내용으로 매년 복사본 같다. 하지만 편지를 준 다음날부터, 빠르면 그 당일날부터 저 각오는 꺾이게 된다. ㅎㅎ 그래서 어느 날은 편지를 읽고 이 말을 못 믿겠다고 했다. 물론 노력하려는 마음이 기특하고 자기들도 하려고 하는데 잘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래도 좀 더 노력하라는 의미에서 농담조로 '엄마는 못 믿겠어, 내년에도 또 똑같은 말 할 거잖아.'라고 말하면, 자기들도 웃는다. 반면에 일상에서 한 번씩 무심코 하는 행동이나 표정에서 아이들의 진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애교 없는 아들이 설거지하는 엄마를 말없이 백허그를 해주고 갈 때, 엄마한테 짜증 낸 후 다시 와서 미안하다며 장화 신은 고양이 눈빛을 날릴 때, 내 옆에서 내 머리카락이나 손을 꼭 잡고 잘 때, '아, 나는 사랑하고 있구나!'라고 느껴져 나도 모르게 엄마미소가 흘러나오더라.
아이들이 순수하다고 해서 거짓말을 아예 못 하는 건 아니다. 그래서 내 자식도 거짓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항상 전제에 깔고 모든 걸 판단해야 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우리 엄마 아빠가 내 말을 믿어주기를, 내가 할 수 있다고 믿어주기를, 나를 믿어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믿고 있다고 느껴질 때 더 힘이 날 것이고 부모님이 내 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 곁으로 와서 우리를 의지하고 우리와 의논할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 앞에서는 의심의 눈초리를 좀 숨기고 '나는 너를 믿는다'는 모습을 보여주되, 만약 거짓이 탄로 나게 된다면 단호하게 혼내야 한다. 너를 이렇게 믿어줬는데 거짓말을 해서 엄마가 많이 속상하다, 앞으로 네가 억울해하면 엄마는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을 알게 해야 한다. 그리고 만약 내 아이가 억울한 상황에 놓였다고 하소연한다면, 그 속상한 마음을 진심으로 다독여주면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아봐주면 좋을 것이다.
결국 나를 믿어달라고 하려면, 나를 믿게끔 내가 노력해야 한다. 의심받을 상황은 최대한 피하고, 평소에 성실한 행동으로 신뢰 마일리지를 쌓아놓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억울한 상황에 놓인다면, 탈출하기 위해 크게 외쳐야 한다. 어이가 없어 입만 벌리고 있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방에게 자신의 진심을 전달하려면 그 사람의 귀를 두드리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을 두드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