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인들은 아마 나를 보고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했을거다. 기차 안에서 ‘보훔역’을 중얼중얼 되뇌고 또 되뇌었다. 보훔 역임을 알려주는 안내방송을 놓치지 않겠다는 필사적인 의지였다.
하지만 난 멀티플레이어가 아니다. 내 앞을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비켜주고, 화장실이 어디냐 묻는 말에 대답해주느라 도착지를 지나고 있는지 몰랐다. 예상 도착 시간이 훌쩍 넘겨서야 내릴 타이밍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마음에 드는 이성이 있어 번호를 묻기 위해 “원래 저번 역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그쪽 때문에 못 내렸어요”와 같은 고전적인 핑계도 아니거니와, 어이없게 역을 놓쳐버린 내 자신이 한심했다.
일단 아무 역에서 내렸다. 여긴 어디 나는 누구. 거기 서 있던 독일인에게 다가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물었다. 혹시 보훔 가는 길을 아세요? 그런데 날 보는 눈빛이 무슨 생선가게에 들아온 고양이를 보듯 한껏 경계하는 눈치가 아닌가. ‘아니, 나보다 키는 곱절이나 더 커보이는구만. 내가 그쪽을 해코지하게 생겼어요? 돈 달라하는 건 더더욱 아니거든요!’ 나의 순수하고 절박했던 심정이 폄하당하는 느낌이 들어, 더 이상 물어보기 겁났다.
혼자 지도를 보고 유추해서 아무 기차나 타고 20분쯤 타고 가던 중이었다. 역무원 두 명이 다가와 표를 보여달라고 했다. 이 기차는 그리로 가지 않으니 내려야 한다고 했다. 원래는 무임승차와 다름없으니 벌금을 부과하는 게 맞지만 역무원들은 나를 순순히 내보내줬다. 자기 덩치만 한 큰 캐리어를 이끌고 반쯤 넋이 나간 듯한 외국인을 본능적으로 피해야겠다 생각한 걸까?
20분 만에 올 거리를 장정 4시간을 헤매어 드디어 보훔 역에 도착했다. 솔직히 말하면 어떻게 왔는지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예능 프로그램에서 재미없는 부분은 통편집 당하듯, 내 뇌에서 그 고통스러웠던 기억을 통으로 삭제한 것이 틀림없다. 사실 보훔 역에서 기숙사까지는 우반(독일 지하철)으로 얼마 걸리지 않는다. 하지만 또 길을 잃게 될까 봐 안전하게 택시를 타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당장 수중에 현금이 없으니 ATM을 찾아야 했다. 아니, 그런데 왜 ATM이 거기에 있어요?
ATM은 역의 거의 중앙에 위치했다. 너무 프라이버시가 지켜지지 않은 위치 아닌가? 난 한국에서조차 돈을 인출할 때 혹 강도가 와서 내 돈을 뺐어가진 않을지 혼자 007 작전을 찍는 사람이다. 하물며 유럽이라니. 소매치기가 하도 많다는 얘기를 들어서 잔뜩이나 긴장했다. 한 손으론 캐리어를 꽉 잡고 ATM 기계에 몸을 딱 붙였다. 빛의 속도로 빠르게 돈을 뽑고 가야 되는데, 흰 건 배경이요 검은 건 글자요. 제발 빨리 되라 좀...! 그런데 갑자기 내 오른편에서 뭔가 모를 인기척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하마터면 너무 놀래 뒤로 나자빠질뻔했다. 발소리도 안 내고 언제 이리 가까이 온 건지. 왠 주머니가 많이 달린 조끼를 입은 독일인 할아버지가 서있었다. 내가 전전긍긍하는 걸 보고선 다가와 돈 뽑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다. 암만 세상 물정 모르는 20살 풋내기라도 그게 사기수법인진 너무 잘 알겠다. 게다가 서양인들은 퍼스널 스페이스(Personal Space)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데, 할아버지 지금 제 공간을 너무 넘어오셨거든요. 노 땡스라 말하고 50유로 정도를 간신히 뽑았다. 돈이 나오는 순간, 흰자위로 양 옆을 빠르게 스캔하는 건 표적이 되기 쉬운 외국인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택시 승강장을 향해 가려는데 또 어디서 나타난 건지 그 할아버지가 왔다. '아니, 진짜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건데요 도대체. 저 돈 진짜 없거든요!!!'라고 말도 못 하지 참. 돈을 인출하는 모든 과정을 어디선가 훔쳐봤을 생각을 하니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지갑이 있는 핸드백을 더 꽉 쥐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뭐가 그리도 궁금한 게 많은지 어디서 왔는지, 공부하러 왔는지 물었다.
자기만 믿고 따라오라고 하더니 한 택시기사에게 독일어로 말을 한다. 그러곤 대뜸 나에게 열 손가락을 펼쳐 보였다. 뭐야, 설마 소개 수수료 뭐 이런 걸로 10유로 달라는 거야? 진짜 그렇게 안 생겨선 정말 너무하네. 울컥했다. 택시기사가 짐을 실어줄 테니 타라고 했다.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열 손가락은 이내 접은 상태로 어서 가라는 손짓을 했다. 알고 보니 외국인인 내가 택시요금 덤탱이를 맞을까 봐 10 유로면 충분히 간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그렇게 열 손가락을 계속 보여줬던 거였다. 자세히 못 알아들었지만 택시기사에게도 이 학생에게 10유로 이상 받지 말라고 독일어로 말했던 것 같다.
정말 10유로 정도로 택시 요금이 나왔고, 그 택시기사는 팁을 요구하기는커녕 8유로만 받겠다고 했다. 내가 학생이고 독일에 온 첫날이니 앞으로 행복하게 지냈으면 좋겠다고 돈을 다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이때까지 너덜너덜 상처 난 마음이 눈 녹듯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최악의 하루가 될 뻔했지만, 이 마음씨 따뜻한 독일인들 덕분에 평생 잊지 못할 하루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