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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영 Oct 13. 2023

박각시 오는 텃밭


가을로 접어들며 점점 텃밭을 잊고 있었다.

배추랑 무가 알아서 잘 자라는 만큼 풀은 속도가 무척 느려졌다.

신경 쓰고 손 가는 일이 많이 없어진거다.

오늘 아침은 마침 국거리가 필요해 얼갈이배추를 뽑으러 며칠만에 갔다.

정말 볼 때마다 배추, 무가 폭풍 성장 중.

텃밭 이웃이 갑자기 건너와 우리 밭에도 흩어주고 간 비료의 힘인지, 원래 김장용들은 그런 것인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다.


그리고 진짜 반갑고 놀라운 건 점점 부풀어 오르는 방아꽃 한 무더기다.

여름내 먹다가 물려 방치했더니 역시 뻥튀기가 되었다.

외국여행지에서 온 동네를 수놓는 라벤더 무더기를 이제 부러워하지 않아도 되겠다.

라벤더, 로즈마리는 향기로운 허브고 방아꽃은 아니었던가.

태생이 경상도 시골에서 지천으로 흔한 식물이라 대접받지 못했다.

여름 반찬에 안 들어가는 데가 없어 뜯기고 뜯기다 결국 꽃피기 전에 뽑히는 신세.

꽃이 올라온들 누가 눈길을 주기나 했던가.

그런데 어떤 아낙네는 꽃과 잎을 말리고 부수어 고기넣은 묵은지 김치전에 솔솔 뿌려 넣었지.

보랏빛이 살아있는 방아꽃 부각은 또 어떻고..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허브로 등극시키고자 조금 꺾어 집에도 꽂아놓기로 했다.

기분이 뻗쳐 꽃 꺾는 모습을 동행자에게 찍어달라 했는데, 의도치 않은 걸작이 나와 버렸다, 하 하!

단풍이 들어가는 들깨와 가지, 주변 배추들까지 딱 요맘때의 텃밭 풍경이 풍성하게 잘 나타나 있다.

거기다…

방아꽃 무더기에서 아침부터 붕붕거리며 벌새처럼 빨대같은 긴 대를 꽂고 꿀을 빨고 있는, 알고 보니 박각시나방을 보고 말았다.

오, 너였구나, 그 박각시나방!

집에 와 백석의 시 <박각시 오는 저녁>을 펼쳤다.

잡히지 않았던 시가 이제야 들어온다.

완전 이맘때구나.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

아침 텃밭은 가랑비 맞은 듯 촉촉이 젖어 있었다.


박각시 오는 저녁

            - 백석 -

당콩밥에 가지냉국의 저녁을 먹고 나서

바가지꽃 하이얀 지붕에 박각시 주락시 붕붕 날아오면

집은 안팎 문을 횅하니 열어젖기고

인간들은 모두 뒷등성으로 올라 멍석자리를 하고 바람을

쐬이는데

풀밭에는 어느새 하이얀 대림질감들이 한불 널리고

돌우래며 팟중이 산옆이 들썩하니 울어댄다

이리하여 한울에 별이 잔콩 마당같고

강낭밭에 이슬이 비 오듯 하는 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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