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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자민 Jul 18. 2022

라면을 '같이' 끓이며

썬데이 파더스 클럽 (5)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사람마다 다른 답을 내놓을 테지만, 내 아이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라면!’이라고 답할 것이다. 


“어떤 라면?”

“아빠, 내가 늘 말하지만… 라면은 참깨라면이 진리지.”


아이는 그동안 꽤나 여러 차례의 강화학습을 통해 제 입맛에 딱 맞는 라면을 찾아냈다. “짜파게티는 초등학교 3학년에겐 너무 어린애(?) 입맛이야.” (동생 준다고 만들면 너도 맛있다고 먹잖아) “친구들이랑 불닭볶음면 먹어봤는데 아무래도 나한테는 너무 매운 것 같아.” (불닭볶음면 까르보나라는 그래도 괜찮지 않니) “전에는 튀김우동을 어떻게 먹었나 모르겠어.” 


아이는 라면을 좋아한다. 나트륨 과다 섭취 걱정에 주말 1회로 제한하지 않았다면 매일마다 후루룩 면치기에 도전할 기세다. 살다 보면 한우보다 라면이 더 맛있을 때가 많다는 걸 아빠도 안다 아들. (요즘처럼 비 오는 날에 소주까지 한 잔 곁들이면 말해 뭐해. 어른이 되면 알게 될지도.)


정신없는 한 주를 보내고 맞은 주말, 요리하기 싫어 꾀가 날 때 한 끼 정도 라면을 끓인다. 스스로에겐 ‘아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라는 핑계를 대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매끼를 만들어야 하는 번거로움에서 조금이나마 해방되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다. 


나른한 오후, 부자간에 눈빛이 마주치고 우리는 교감한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우리. 내가 먼저 싱긋거리면(라면?) 아들이 방긋(…참깨라면?) 웃는다.


좋아, 하고 주방을 향해 가는데 아이가 뒤에서 한 마디를 보탠다. “나도 라면 끓여보면 안 돼? 나도 끓일 수 있을 것 같은데.” “안돼, 그러다 데이면 어쩌려고. 화상 입으면 큰일 난다.” “아니, 아빠 나 초3이야. 초3.”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을 읽었는지 아이는 전에 없이 강력한 레이저를 눈에서 뿜는다. 어라 저 눈빛은 입사 후 두 달쯤 지났을 때의 신입들 눈에서 나오는 안광이렸다.


“대신 조건이 있어.”


내가 내건 조건은 두 가지였다. 하나, 라면 봉지 뒤의 조리법을 잘 읽고 그대로 따를 것. 둘, 라면 조리법을 배우고 난 뒤에도 늘, 항상, 언제나 보호자가 옆에 있을 때 불을 켜고 라면을 끓일 것.


우리는 적당히 냄비 물을 맞춰 불 위에 올려놓았다. 물이 보글보글 끓자 아이는 물었다.


“면부터 넣어야 해, 스프부터 넣어야 해?”

“(그건 부먹 찍먹만큼 논란이 많은 문제이긴 한데) 조리법에는?”

“스프 먼저 넣고 면을 넣으라는데?”

“오케이, 처음 무얼 배울 때는 가이드를 그대로 따르는 게 좋아. 모방 후에 창조가 있거든.”


30년쯤 전이었을까. 처음 라면을 끓여보겠다고 부엌에 들어가서 내 맘대로 아직 채 익지도 않은 라면에 계란을 때려 넣고 한 젓가락 집었을 때의 비릿한 느낌이 아직도 잊히지 않고 입안을 감돈다. 주말이었을 텐데, 아마도 혼자 아니면 동생과 단둘이었을 것이다.


평소와 다르게 아이는 냄비 표면에 초집중하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작은 공기방울들이 보이자 아이는 스프와 계란블럭을 먼저 넣고 면을 살짝 집어넣었다. 


“계란도 넣어야겠지?”

“파송송 계란탁.”

“그것도 내가 해볼래. 나 잘할 수 있어.”


냉장고에서 파를 꺼내 썰어주고, 계란도 한 개 건네줬다. “계란은 모서리에 톡 쳐서 살짝 깬 다음 양손으로 벌려 넣으면 돼.” “… 퍽!?” 힘 조절에 실패한 아이의 손 아래로 계란이 껍데기와 같이 퐁당 빠졌다. “괜찮아, 처음인데 뭘.”


껍질을 대충 건져내고 마저 끓여냈다. 라면이 완성되었다. 아들이 끓인 인생 첫 라면. 젓가락을 들고 마주 앉은 아이는 조심스럽게 묻는다. 


“그래도 나… 잘했지?” 

“엉, 처음 치고는 잘하던데? 다음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아까 말한 걸 잊으면 안 된다? 집에 어른 있을 때만 같이 끓이는 거야.”

“응!”


아이 눈은 별빛처럼 빛난다. 접시 바닥까지 남김없이 비운 아이는 역시 참깨라면이 제맛이라며 배를 몇 번 두드리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들은 제 손으로 라면을 끓여 먹으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배정민


실리콘밸리 창업자들에 관한 책을 읽다 보면 중요한 순간에 빌 캠벨이라는 사람이 등장한다. 빌은 원래 미식축구팀 코치였으나, 마흔에 비즈니스로 업을 전환했다. 그리고 그는 애플과 구글 등 테크 기업의 리더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최고의 코치로 꼽힌다. 


구글 전 CEO인 에릭 슈미트 등이 쓴 《빌 캠벨, 실리콘밸리의 위대한 코치》에서는 빌이 수많은 리더들의 추앙을 받았던 이유를 ‘안녕’이라는 키워드로 표현한다. 코치일 때는 승리보다 선수의 안녕에 더 관심을 가졌고, 임원들이 당신은 무엇으로 밤잠을 설치느냐고 물을 때면 늘 부하직원의 안녕과 성공이라고 대답했던 코치 빌 캠벨. 그는 경영 조언을 구하는 사람에게 당신의 부하직원이 당신의 아이라고 생각하고, 그들이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라고 말했다고 한다.


아이의 인생 코치로서, 나는 제 역할을 잘하고 있을까. 보통 열에 아홉은 투닥거리느라 혼이 나가 있는 보통의 아빠이지만 그래도 마음만은, 그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만은 빌 캠벨 못지않은데.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겨우 라면 끓이는 법 정도라면, 나는 그 작은 과정을 통해서나마 아이에게 자칫 지나치기 쉬운 여러 가지 삶의 단면들을 전달해주고 싶다. 사실 스프를 먼저 넣든 면을 먼저 넣든 그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겠으며, 면을 그대로 넣든 반으로 쪼개 넣든 무슨 상관이 있을까. 라면은 어쨌거나 맛이 없을 수 없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큰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라면 끓이기를 통해 어떤 일이든 처음 발을 내딛을 때라면, 섣불리 덤비지 말고 차근차근 하나씩 배워나가며 제 것으로 만드는 힘을 기를 수 있기를 바란다. 동시에 자칫 실수를 하더라도 더 큰 위험으로 번지지 않도록 옆에서 재빨리 잡아줄 수 있는 코치와 함께 일을 배워갈 수 있기를 바란다.


며칠 후, 아이가 쪼르르 달려와 도전적인 눈빛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다소 따지는 말투였다. “아빠, 안성탕면에는 면이랑 스프랑 같이 넣으라고 되어 있는데!?” (찌릿)


끓이기 전에 뒷면 조리법 한 번이라도 읽어봤음 됐다.





정민@jm.bae.20

  

다음 책이 언제 나올 지 모르는 에세이스트. 윈스턴 처칠의 '절대,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마라'라는 말을 좋아한다. 죽기 전에 아이들과 함께 고향 야구팀의 우승을 보는 것이 꿈이다. 《아들로 산다는 건 아빠로 산다는 건》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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