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을 지나 12월이 되었다. 점점 밤이 빨리 찾아온다. 5시가 넘어가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해서 6시 전에 이미 사방이 깜깜하다. 일 년 중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동지가 가까워지고 있다. 밤의 기운이 가장 길어지는 날이 동짓날이라지만, 그 날을 기점으로 밤은 조금씩 짧아진다. 가장 높은 곳에 오른 순간 떨어지는 롤러코스터처럼, 가장 둥글었을 때 다시 사그라드는 달처럼, 밤도 가장 길었던 날 이후로는 낮이 더 길어지는 법이다. 바쁘게 변해가는 계절에 맞게, 겨울 날 준비를 하며 12월을 시작했다.
주말에 친정에서 하룻밤 자며 김장을 했다. 배추가 너무 좋아 사서 절인다는 엄마 덕에 배추절이고 씻는 것 부터 했더니 자고 일어난 오늘, 온몸이 쑤신다. 허리는 기본이고 어깨 팔, 손목, 허벅지까지 다 후들거린다. 양도 많이 줄어 예년의 반도 안되는 양만 했는데도 내가 이리 힘드니, 늙으신 엄마는 얼마나 힘들까. 어젯밤 집에 돌아와 씻고 쉬려는데 옆에서 남편이 살짝 눈치를 보더니 내년에는 하지 말잔다. 김치통 들고 데리러 오기만 한 주제에 수육과 굴보쌈을 제일 잘 먹으면서 말이다. 그게 내 맘대로 되나 엄마 맘에 달린거지.
배추를 반으로 갈라 욕조 바닥에 차례로 줍히고 켜켜이 소금을 뿌려 하룻밤을 재운다. 새벽에 일어나 한 번 뒤섞어주고 아침에 깨끗하게 헹궈내어 채반에 올려 물기를 뺀다. 다 낡은 채반에 하나씩 올려두는데 엄마가 얘기하신다.
"이 채반이 얼마나 된거지 아냐? 이거 내가 시집올때 할머니가 사주신거다. 저 스뎅 다라이랑 같이."
"세상에, 엄마 결혼할 때면 50년도 더 된거 아냐?"
여기저기 휘어지고 부러진 낡은 나무 채반이 그렇게 오래 묵었다는데 놀랬고, 50년 넘도록 버리지 않고 쓴 엄마에 또 놀랬다. 여직 버리지 않고 쓰고 있는게 신기했다.
"이제는 그만 써야겠다. 내년에는 새거 사서 쓸란다."
정말 그럴까? 내년 김장에는 새로 산 빤짝거리고 빛깔좋은 새 채반위에 배추를 올리고 있을까?
"그러지 말고 그냥 절임배추 사다 해요. 뭘 또 새걸 사."
말은 이렇게 하시지만 사실 아끼시는 마음이 짐작되어 한 마디 보태봤다.
소금에 절여진 채 낡은 채반 위에 차곡차곡 얹혀진 배추를 보고 있으니 꼭 내 모습 같아보였다. 파릇하니 싱싱함은 잃었지만 뻣뻣함 대신 부드러움을 얻어가는 배추, 쓰고 짠맛을 겪어내며 내 몸속의 수분을 빼낸 대신에 다른 양념의 맛을 받아들여 절묘한 감칠맛과 깊은 맛을 간직하며 김치가 되어가는 배추. 거기에 중년의 내 얼굴이 겹쳐졌다. 그래서일까, 힘들다고 불평하거나 진두지휘하는 엄마한테 입대지 않고 시키는대로 이리저리 자리 옮겨가며 즐겁게 김장을 마칠 수 있었다. 푹 삶은 수육에 뻘건 양념 잔뜩 묻힌 배추 속 잎 때어 둘둘 말아 엄마 입에도 넣어주고, 입가에 양념 묻혀가며 내 입에 넣어가며 말이다.
그렇게 엄마와 함께 배부르고 즐겁게 올해의 김장을 마쳤다. 통에 담고 잘 닦은 냉장고 안에 쌓아두자 올해 할 일 다 마쳤다며 손수 깍아 말린 곶감 한 접시를 먹으라고 내주신다. 이것도 하나하나 손으로 깎아 저 채반위에 올려 베란다에서 가을바람 맞혀가며 말리신거다. 하얗게 분이 올라와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것이 한 입 베어무니 단맛이 온 몸으로 퍼진다. 맵고 짠 양념을 잔뜩 먹고 난 후라 달디단 곶감이 얼마나 맛있던지, 앉은 자리에서 아이 주먹만한 대봉시 곶감을 두 개나 먹었다.
트렁크에 김치통을 싣고 돌아오는 차 안, 이미 캄캄해진 창 밖을 보고 있자니 피곤해 절로 눈이 감겼다. 그런데 잠은 들지 않고 자꾸 엄마의 채반이 어른거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 버티고 있는 엄마의 낡은 채반과, 그 위에 절여진 배추와, 온갖 재료들을 넣고 버무린 김칫속이 조용히 내 안에서 뒤섞이고 있었다. 무려 오십년 세월을 이겨내고 버텨낸 저 채반. 엄마의 채반 위에서 엄마의 시간은 조용히 흐르고 쌓였을 것이다. 앞으로 내 남은 시간들도 그렇게 흘러가면 좋겠다.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부드럽게 휘어지며 배추의 무게를 견뎌내는 저 채반처럼, 김치냉장고 깊은 곳에서 조용히 숨쉬며 익어갈 올해의 김장김치들처럼. 그렇게 나이들어가고 싶어졌다.
이제는 나도 아삭하고 칼칼한 겉절이가 아니라 오래 오래 묵혀둔 묵은지가 되어야겠다. 깊은 맛을 품어 돼지고기를 만나건 고등어를 만나건 재료의 맛을 최대로 끌어내어 변모시키는 숙성된 묵은지가 되어보자. 내년 늦봄, 맛나게 익은 김장김치를 꺼내 멸치 넣고 보글보글 끓일 때, 그 풍미넘치는 국물을 한 술 떠먹으며 김장 담그던 오늘을 떠올릴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때 되어 엄마에게 새 채반을 사드릴 지, 쓰던 채반을 쓸 수 있는데까지 써보자고 할 지 생각해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