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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피어라 Jun 02. 2023

이제는 못 먹을 옛날 팥빙수여!

언감생심은 이럴때 쓰는 말이다

  학교앞 분식집에 새 현수막이 붙었다. '옛날 팥빙수 4000원.' 더워지는 날씨, 사장님의 센스가 빛을 발한다. 기가막힌 타이밍이다. 누구라도 들어가 빙수 한 그릇 먹고싶은 계절이 왔다.

  한동안 빙수계는 달달한 우유를 갈아서 만든 눈꽃빙수가 접수했다. 입안에서 부드럽게 녹는 달달한 얼음에 갖가지 과일과 토핑이 얹어져 팬시한 매력을 뽐내는 디저트. 아예 빙수전문브랜드가 생겨 한겨울에도 빙수를 즐길 수 있고 호텔에서도 내놓는 메뉴가 되었다. 세월을 따라 가격도 무시무시하게 올라 이젠 왠만한 국밥 한그릇보다 더 비싼 돈을 주어야 먹을 수 있지만, 무덥고 습한 여름에는 빙수만한 간식도 없다.


  어릴 때 동네 골목어귀 떡볶이 집에 한여름이면 '팥빙수 개시'라고 씌인 종이가 붙었다. 그때부터 동네 꼬맹이들은 용돈을 모아야 했다. 땀 범벅이던 하굣길에 차고 달달한 팥빙수 한그릇을 먹으려면 말이다. 돈이 없어 먹지 못하는 날엔 성냥팔이 소녀도 아닌 데 가게 밖에서 사장님이 얼음을 갈아서 팥빙수 만드는 모습을 넋을 잃고 구경하기도 했다. 사각사각 얼음이 갈리는 소리와 그릇에 눈처럼 쌓이는 얼음만 봐도 행복했으니까.


  먼저 커다란 냉동 스티로폼 박스에서 네모나게 잘린 얼음덩이를 꺼내 탑처럼 생긴 기계에 올려놓는다. 위쪽 나사로 얼음을 고정하고 옆에 달린 손잡이를 힘차게 돌리면 칼날 위에서 얼음이 갈려 밑에 받쳐놓은 그릇 위로 수북하게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설탕 넣고 졸인 팥앙금과 미숫가루 한 숟갈 털어 넣으면 세상 달고 시원한 팥빙수가 나왔다. 입안에 넣으면 얼음이 바로 녹지않고 으득으득 씹어 먹어야한다. 그러면 나도 모르게 띵해지는 머리와 쭈뼛해지는 목덜미를 만지면서 더위를 잊었다. 거기에 매콤한 떡볶이 한 접시를 같이 먹으면 세상에 무엇도 부러울것이 없었다.


  바람에 날리는 현수막을 보자 어릴 때 먹던 그 빙수, 야성의 팥빙수가 떠올랐다. 지금은 전동빙수기로 순식간에 갈려 투박한 맛은 덜하겠지만 미숫가루가 여전히 소박한 맛을 지키고 있을 그 옛날 팥빙수. 저 분식집에 들어가 뜨거운 떡볶이 한 접시와 차가운 빙수 한 그릇을 시켜놓고 번갈아 입에 넣으며 만년설과 화산을 동시에 느껴보고 싶다. 으드득 얼음을 씹어 삼키며 어린 시절의 추억을 다시 맛보고 싶다. 하지만 이제는 영영 이루기 힘든 꿈이다. 남은 생, 더 이상 팥빙수의 계절은 오지 않는다. 아니, 올 수 없다.......



이가 시려서. 이가 시려 이제는 먹을 수가 없다!


  롯데리아 소프트아이스크림도 제대로 못 먹는데, 얼음 가득 팥빙수라니. 언감생심이다. 지나가며 입맛만 다셨다. 이렇게 못 먹을 줄 알았다면 좀 더 많이 먹었을거다. 끼니마다 고추를 상 위에 올려놓으실 정도로 좋아하던 매운 음식을 이제는 멀리하시는 여든 살 아버지처럼, 그렇게 좋아하는 바지락을 씹기 힘들어 칼국수 면발만 건져 드시는 어머니처럼, 나도 즐기던 음식을 못 먹게 되는 날이 머지않은 느낌이다.


  하긴 그런 게 어디 음식뿐일까. 여행도 운동도 노래도, 이전만큼 즐기기 어려워진다. 빙수에 관한 추억을 떠올리다 갑자기 나이 들어가는 서려움에 목이 메일 것 같다. 안되겠다. 차가운 건 입에도 못 대는 날이 오기 전에 옛날 팥빙수를 먹어봐야겠다. 이가 시리건 말건 천천히 느릿느릿 조금씩 먹으면 되겠지. 입 안에 넣고 녹여 먹는 한이 있어도, 오늘 저녁엔 팥빙수다.




  퇴근길, 결국 분식집 앞에 비장하게 섰다. 잠시 고민하며 가게 앞을 서성대다 마음을 굳히고 의자 하나 당겨 튀김과 떡볶이 판앞에 앉았다. "사장님, 빙수 하나 주세요."주문하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핸드폰은 이미 찍을 준비를 마쳤다.


  3분이나 지났을까, 순식간에 얼음이 갈리고 육개장 사발면 용기에 수북하게 담긴 빙수가 나왔다.  연유도 뿌리고 약간의 떡과 시리얼도 들어있어 옛날팥빙수치곤 나름 현대적이었다. 그래서 사천원인가. 좀 더 저렴해도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하며 숟가락을 드는데 눈앞에 빙수를 보니 혼자 먹긴 좀 많아 보였다. 남길게 뻔했다. 나눠먹으면 딱 좋겠다 싶어 옆에 친구와 수다 떨며 떡볶이 먹고있는 여중생에게 말을 걸었다. 이럴때 발휘되는 푸근한 아줌마력.


"학생, 혹시 괜찮으면 빙수 좀먹어볼래요? 혼자 먹긴 많은데."

"괜찮은데..."

"한 입씩만 먹어봐요. 시원하게 먹어보고 맛있으면 다음에 또 사 먹어요. "


  옆자리 아줌마의 오지랍에 당황하더니 이내 수줍게 웃는다. 빙수를 나눠먹자고 권하는 내 말을 들은 사장님이 얼른 그릇과 플라스틱 숟가락을 챙겨주신다. 거기에 둘이 먹어도 괜찮을만큼 넉넉하다고 틈새 광고도 덧붙이신다. 진짜 사장님 센스 넘치신다.


  푹푹 떠서 나눠 담아 학생에게 건냈다.

"고맙습니다."

수줍게 인사하고 맛나게 먹는 어린 학생을 보니 어찌나 뿌듯하던지. 거절했을만도 한데 받아주어서 너무 고마웠다. 거칠게 갈려 씹히는 얼음 덕에 팔에 소름이 돋아도 마음은 따스했다.

  반 덜긴했지만 먹다보니 한그릇을 다 비웠다.  어금니로 와드득 얼음을 씹어 먹는 것도 할만했다. 아직은 먹을만한데? 아무래도 이 글의 제목을 바꿔야겠다.

- 아직은 먹습니다, 팥빙수

이 정도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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