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복직을 앞두고 준비할게 많다고들 한다. 간만에 머리 손질도 하고 출근룩도 준비해야 하고, 몸과 마음을 다시 출근모드로 돌리기 위한 비용이 들어간다. 반면 퇴사할땐 앞으로 줄어들게 될 수입에 맞춰 긴축재정에 돌입하게 된다. 그러나 난 오히려 퇴직 후 소비가 많아졌다. 마치 복직을 준비할때처럼. 내 직장은 애초에 집이고 직업은 애초에 육아였다는 듯, 직장다닐 땐 몰랐던 지출이 훅훅 늘고있다.
일단 직장다닐 땐 정작 필요없던 옷이 오히려 집에 있으니 필요해졌다. 고백하자면 나는 패션테러리스트다. 감각은 타고나는 게 분명하다. 내게 예쁘게 옷을 입는다는 건 미션임파서블. 그래서 직장다닐 땐 가장 무난한 스타일의 정장바지 3종과 블라우스 3종, 겨울엔 니트 3종과 겨울바지 3종을 무한 돌려입기로 버텨왔다. 어설프게 차려입는 것보다 이게 최선이었다. 7시면 출근길에 나서 빨라도 저녁 7시가 되어 컴백홈 하는 일상이 반복되다보니 퇴근 후 잠깐 동네 슈퍼 정도는 편안한 홈웨어로 커버 가능했다.
그러나 전업맘이 되고나니 등하교때 아이 친구 엄마들과 마주치게 된다. 대낮에 장보러 다닐 때도 직장인 시절 밤에 잠깐 돌아다닐 때보다 동네 아는 얼굴과 맞닥뜨릴 일이 많아졌다. 패션 테러리스트라는 악명에 걸맞게 옷을 신경쓰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허접한 의상은 나를 움츠러들게 만들었다. 옷은 그저 추위와 더위를 막고 몸을 보호하는 기능이 다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출근할 때 입던 무채색의 정장풍 옷들을 집에서 설거지하며, 시장에 장보며 입기에는 또 부적합했다. TPO에 맞지 않는건 둘째치고 내가 불편해서 선 듯 손이 가지 않았다. 직장인 시절 돌려입을 근무복이 필요했다면 이젠 돌려입을 홈웨어가 필요했다. 이쯤에서 질러야지 뭐..
또하나 크게 지출한 것이 지금 사용하고 있는 노트북이다. 회사에서는 매번 컴퓨터 앞에 앉아있기에 집에 와서까지 컴퓨터가 필요하지 않았는데, 회사에 가지 않으니 가장 필요한 것이 컴퓨터였다. 앞서 4년 전 육아휴직에 돌입할 때도 노트북부터 구입했다. 게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자주 사용하는건 아니라 인터넷 연결만 돼면 OK인 나에게는 고사양의 제품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저렴하고 후기가 좋은 제품으로 구매했는데, 그 제품은 4년만에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수리가 필요한 상태가 됐다. 자판 몇 개가 어긋났는데, 수리하려면 전체를 교체해야 한다고. 용량 또한 작아서 휴대폰에 있는 사진을 옮기다보니 공간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참에 새 제품으로, 그리고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적당한 사양에 오래 쓸 수 있는 제품으로 신중히 고르다보니 적당한 지출이 뒤따랐다. 아이들이 온라인 수업을 하다 보니 자료출력용 복합기도 구매하고.
무엇보다도 아이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간식비, 학원비 지출도 늘었다. 직장다닐 땐 아이들 하교 후는 한참 일하는(=돈버는) 시간이며 동시에 돈을 쓸 수 없는 시간이었지. 공부와는 담을 쌓은 아이들은 그동안 지출 면에서만 보면 효자였다. 엄마 돈 아끼라고(?) 학습에는 1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아이들. 학원에 보내봐야 학원 전기세만 내줄 것이 뻔히 눈에 보이는 아이들을 불안감 때문에 억지로 보낼 필요는 없었다. 그러나 전업맘으로 아이들과 함께하다 보니 아이들은 학습이 아닌, 다른 배움에 대한 열망을 표출했다. 키즈 필라테스를 하고싶다고. 처음엔 그저 호기심으로 넘겼지만 몇 달간 강렬히 지속되는 배움 요청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래, 학습이 아니어도 배우고 싶을 때 뭔가를 배우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겠지. 학군지가 아닌 곳에 살다보니 학원 자체가 많지 않은데, 동네 필라테스 강좌가 있는 헬스장에 전화를 돌려보니 키즈클래스가 있는 곳은 단 1곳도 없고, 그나마도 개인레슨으로 아이들을 받는 곳도 많지 않았다. 1:1 레슨을 하는 곳에 가보니 비용도 만만치 않고ㅠ 부디 열심히 배워서 키도 쑥쑥 크고, 어린시절 기분좋은 경험이 되길 바란다.
바쁜 직장인으로 살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그래도 이 시간이 귀하고 소중하다. 매일 아침 아이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보고, 끝나면 데려오고. 예기치 않은 온라인 개학으로 사물함에 있어야 할 교과서가 집, 학교를 왔다갔다 하다보니 등교날이면 가방의 무게가 어른인 나에게도 버겁게 느껴진다. 내가 일을 할 땐 그 무거운 짐을 당연한 듯 아이들 혼자 해결해야 했는데, 지금은 들어줄 수 있어 행복하다. 그 평범한 일상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아이들의 초등 시절을 함께할 수 있다는 것. 회사에서 무슨 일을 겪었고 어떻게 회사에서 나오게 됐는지 잊게 해줄 만큼 귀한 시간들이다. 이 순간들은 돈으로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오늘도 난 지갑을 연다. 근데 지갑을 여는 손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은 왜일까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