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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중희 May 02. 2021

하이케의 인생 요리 한국의 잡채

5년 동안 지속된 하이케의 잡채 사랑


독일에서 하이케라는 이름은 여성의 이름으로 흔한 이름 중에 하나다.

우리의 지영이 쯤 되려나? 그래서 내가 잘 알고 있는 하이케만 해도 셋은 되고 일하면서 그냥 스쳐 지나가듯 만난 하이케는 수두룩 빽빽이다.

그런데...

그 많고 많은 하이케 중에 독일에서 십수 년간 한국요리 강사로 일해 오면서 잊을 수 없는 하이케가 한 명 있다.

내가 그 하이케를 만난 것은 코로나 가 시작되기 바로 전인 2019년 겨울이었다.


그날도 언제나와 같이 나는 문화센터의 강습실에서 한국요리 강습을 위한 준비를 하느라 분주했다.

저녁 6시 강습이지만 늦어도 5시면 도착해서 이론 수업을 위한 비머를 설치하고 조별로 나누어 줄 식재료를 선별하고 강습을 준비하고는 했다.

그러다 보면 강습시간 보다 한 30분 정도 일찍 도착한 수강생들을 만나는 날이 있다.


부지런히 일찍 도착한 수강생 들은 강습실에서 소리가 나고 문이 열려 있어 기웃거리기는 해도 선뜻 안으로 들어오지 못한다. 너무 일찍이라 혹시라도 강습 준비하는 내게 방해가 될까? 싶어서다. 그럴 때면 나는 활짝 웃으며 어서 들어오시라고 맞아 주고는 한다.


미안한 듯 주춤주춤 들어오는 수강생들의 얼굴을 보면 대략 짐작이 간다.

대부분의 수강생 들은 5분 10분 정도 일찍 오거나 성질 급한 사람들은 15분 정도 일찍 오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나 여유 있게 도착한 수강생들은 대부분 셋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첫째 강습에 대한 기대가 큰 경우, 둘째 문화센터가 시내 중심에 있다 보니 주차가 쉽지 않다 그래서 일찍 나오다 보니 너무 일찍 오게 된 경우 셋째 함께 강습을 받기로 한 친구 또는 직장동료 들을 미리 어디서 만나서 같이 오기로 하다 보니 너무 서두르게 된 경우 다.


내가 하이케를 만난 그 강습에서도 하이케와 그녀의 동료 그리고 가족팀 셋이 강습이 시작되기 30분도 더 남은 시간에 강습실 복도를 서성였다.

그들을 강습실로 들이며 나는 하이케와 그녀의 동료는 분명 첫 번째에 해당한다고 짐작했다.

그녀의 들뜬 목소리와 상기된 볼 그리고 한국 식재료 간장, 고추장, 참기름, 당면, 들을 구경하던 그 눈빛이 이미 그것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럴 경우 나는 어떤 계기로 한국요리 강습을 이렇게 기대하며 오게 되었는지가 몹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녀들에 나를 도와 강습 준비를 할 수 있는 자잘한 일거리들을 나누어 주며 물었다.

"그전에 한국요리를 먹어 본 적 있나요?" "어떻게 한국요리 강습을 오게 되었어요?"라고...

나는 내 두 가지 질문에 자세한 설명을 덧붙여 주던 하이케의 대답을 듣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전에 한국음식을 먹어 본 적 있나요?"라는 내 질문에 자기가 하이케라고 소개했던 보기에도 이번 강습이 엄청 기대되요를 온몸으로 말하는 것 같던 그녀가 "그럼요 당신의 한국 글라스 누들 요리요"라고 했다.(*독일에서는 당면이 반짝이는 유리처럼 투명하다 해서 글라스 누들이라 부른다.) 잡채라... 나는 빠르게 기억을 떠 올려 보았다. 그러나 자주 만나지는 하이케라는 이름만큼이나 청바지에 면티를 입고 금발머리를 하나로 묶은 스포티 하면서도 평범한 그녀의 모습은 미안하게도 얼른 떠오르지가 않았다.

나는 미안한 웃음을 지으며 "혹시 제게 다른 한국요리 강습을 받으셨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원스레 웃으며 "조금 오래된 일이라 기억 못 하실 수 있어요"라며 내 기억을 그때로부터 5년 전 가을로 데려가 주었다.


때는 바야흐로 2014년 가을 지금은 대학생이 된 우리 집 딸내미가 김나지움 9학년 우리로 중3일 때였다.

그 당시 제2외국어로 프랑스어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는 카셀과 그 옆 도시들의 프랑스어 교사들이 힘을 합쳐 3개교 프랑스 교환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조금 자세히 설명하자면 독일의 프랑스어 교사들과 프랑스의 독일어 교사들이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해서 배우고 있던 독일 학생 들과 프랑스에서 독일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해서 배우고 있던 프랑스 학생들을 2주씩 교환해서 가정에서 프랑스 문화 독일 문화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연수 프로그램을 만들어 낸 것이다.


2014년 가을 프랑스에서 먼저 학생들이 독일로 왔고 그다음 해에 아이들을 프랑스로 2주 교환해서 보낼 집에서 각각 학생들을 맡았다.

우리 집에도 콜린이라는 프랑스 학생이 2주간 지내다 갔고 그다음 해 우리 딸내미가 콜린 네 집에 가서 2주 있다 왔다.

그 프로그램의 시작을 알리는 그릴 파티가 2014년 가을 호숫가에서 있었고 참가 인원이 해당되는 학생 들과 그 형제자매들 그리고 학부모 거기에 교사들까지 수백 명에 이르렀다.

어쩌면 내가 바로 그녀를 기억해 내지 못했던 것은 당연했는지도 모른다.


그날 그릴 파티는 학교들 에서 주관했고 나머지 샐러드, 음식, 빵, 음료수, 디저트 등은 학부모들의 기부로 이루어졌다.

그런 파티에 한국요리 들고 가는 것이 취미인 나는 그날도 우리의 맛난 채소 잡채를 신나게 만들어 갔다. 커다란 통으로 한가득 들고 갔지만 인원이 많고 채소 잡채가 고기 그릴과 잘 어울리는 음식이다 보니 순식간에 동이 났다. 그 호숫가에서 잡채를 먹어 보고 너무 맛있다며 이게 도대체 어느 나라 음식 이냐부터 이안에 뭐가 들어갔느냐 물었던 수많은 독일 사람들 안에 그리고 내가 신바람 나게 한국요리와 잡채에 관해 썰을 풀고 있을 때 귀 쫑긋 세우고 함께 듣고 있던 이들 중에 하이케가 있었다.




하이케는 이렇게 이야기했다.

"가족 들과 그릴을 하다 보면 문득문득 그 호숫가에서 먹었던 한국의 글라스 누들이 생각났어요. 아삭 거리는 채소들과 뭔지 모를 기가 막힌 소스에 버무려진 그 맛난 누들의 맛이 선명하게 말이에요"

그리고 그녀는 그 호숫가에서 내가 한참이나 썰을 푸는 동안 내내 곁에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독일의 문화센터 2군데에서 한국요리 강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들었던 게 기억에 남아 인터넷으로 나를 찾았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그동안 강습에 등록을 하려고 무던히 노력을 했는데 번번이 강습이 마감이 되어 버리는 바람에 아쉽게도 오지 못했다며 드디어 오늘 왔노라며 활짝 웃었다.


하이케는 그 겨울 한국 채식요리 강습에 수강 신청이 되었다는 연락을 문환 센터로부터 받았을 때 뛸 듯이 기뻤다고 했다. 그전날 잠도 오지 않을 만큼....

듣다 보니 그녀가 강습 전 30분이나 일찍 오게 된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만했다.

왜 아니겠는가, 그야말로 잡채를 만나기 위해 5년을 기다리지 않았는가...

잡채는 요 샛 말로 하이케에게 있어 인생 요리였던 셈이다.

요즘도 하이케는 그릴을 할 때면 콧노래를 부르며 맛난 잡채를 만든다.

그 강습에서 깨알 같이 적어 둔 팁들은 이미 숙지 한지 오래다.

어쩌면, 그 집이 우리 집 보다 잡채 먹는 횟수가 더 자주 일지 모른다.


한국요리 강습을 하지 못한 지 1년이 넘어간다.

코로나로 인해 줄줄이 취소된 한국요리 강습 안에 어쩌면 제2의 제3의 하이케가 한국요리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이 코로나 시국이 언제쯤 잠잠해져서 우리의 평범했던 일상들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그러나 그날이 오면 한복에 앞치마 두르고 완전무장? 한 체 기쁘고 설레는 마음으로 또 다른 하이케 들을 강습실에서 기다릴 것이다. 늘 그러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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