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엄청난 사람입니다.
자신감이 넘치거든요.
자존감도 높습니다.
세상에 제가 이루지 못할 일은 없었습니다.
초과 달성할 수 있는 목표만 세웠거든요.
그러니 주변 사람들이 잘한다 잘한다 추켜세웁니다.
주변인들이라 해 봤자 가족 위주이긴 해요.
딱히 실패해서 좌절감을 맛볼 일도 별로 없었고요.
실패는 무조건 좋은 경험으로만 생각하는 뻔뻔함도 갖췄었어요.
얼마나 교만 하나면요.
직장 일로 제주도에서 몇 년 지낸 적이 있어요.
한라산을 올랐습니다.
다녀와보신 분은 아실 거예요.
한라산 정상에서 제주 전역을 내려다보기 힘듭니다.
시야가 확보되는 날이 몇 없거든요.
성판악 코스로 몇 시간째 눈 길을 올랐어요.
너무 맑아서 쨍 한 날 있죠?
오르는 내내 너무 날씨가 좋은 겁니다.
와 역시 내가 날을 잘 골랐군.
아니나 다를까.
한라산 정상을 오르는 그 능선에서부터 였어요.
서귀포가 한눈에 다 보입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하게요.
한라산 정상에서는 대부분 엄청 바람이 많이 불어요.
몸이 휘청거리더라고요.
그런데 그 서귀포가 다 내려다보이는 그 걸 보면서요.
제가 무슨 생각을 했게요?
이 제주를 놀라게 해야겠다.
내가.
이제 이 제주 섬을 시작으로 지금 내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넘어 이 대한민국을, 세계 정상에 서야지.
지금 보이는 것처럼 내 발아래 둘 것이다.
우하하하 하하.
아니 이 얼마나 우스워요.
뭐 풍광이 좋아서 등산의 감동이 벅차서 그럴 수 있죠.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그런데 진짜 저런 생각을 했다니까요?
그렇다고 뭘로 놀라게 할 건지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 이후에 실제로 그렇게 하기 위해서 해 본게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냥 그렇게 마음만 먹고 끝.
지금은 저런 생각이 얼마나 오만한지.
자고 자대(自高自大) 한지.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기억 자체가 창피해요.
네, 포부가 크고 꿈이 크고 소망이 있는 건 좋아요.
그런데 내실 없이 꿈만 큰 건 위험해요.
아무것도 없이 어디 감히.
고백하자면 저는 2-3년후 도망치듯 제주를 떠났습니다.
왜냐하면요.
제 감정을 잘 감당하지 못했거든요.
수신(修身) 도 안되는 사람이었어요.
슬픈 마음을 다스리지 못했습니다.
제주에서 뭘 제대로 시작해볼수도 없었습니다.
이제는 압니다.
나는 내 뜻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걸 알기도 해요.
이 세상에는 내 마음대로 안되는 게 있다는 것도요.
높은 곳을 올려다보며 살 것인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며 살 것인가.
항상 위에서 내려보고 싶었어요.
20대 때의 저는 참 건방진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에베레스트산이
K2가
칸첸중가가 있는지도 모르고
백두산도 없는 데서
한라산도 안 올라보고
동네 뒷산이 뭐예요.
겨우 언덕 위에 올라가서는 저런 마음을 가졌습니다.
내가 아는 게 다인 줄 알고.
얼마나 더 큰 세상이 있고
나보다 더더더 잘난 사람이 얼마나 많고
내가 사실은 찻잔보다 작은 우물에 사는 지도 모르고요.
지금 전 30대를 이제 잘 마무리해야 하는 때입니다.
제 서른의 이립은 좀 늦었던 것 같아요.
그래도 불혹 전에 어렴풋이 저만의 뚜렷한 신념을 세워가고 있는 것을 요즘 들어 느낍니다.
우연한 기회에 100층 높이 전망대에 올랐습니다.
발아래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태평양도요.
그 광경을 보는 제 마음은 이제 한라산에서와는 많이 다릅니다.
더 낮아져야 하고
더 겸손해야 하고
더 열심으로 노력하고
더 겸허해져야겠다 생각했어요.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무게를 느끼고
내 생각이 흘러갈 곳을 내다보아야겠다고 말입니다.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난날의 나를 반성하게 됩니다.
오늘 높은 곳에 가니 갑자기 한라산에서의 철없는 다짐들이 떠오르며 얼굴이 화끈거렸어요.
원래 모르면 용감하잖아요.
아마도 그때는 몰라서 그랬나 봐요.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없을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요.
이제는 함부로 교만할 수가 없습니다.
똑같이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경험을 통해서
그때와 지금은 다른 생각을 합니다.
아마 한라산에 다시 오르면 그 때와는 다른 더 나은 다짐을 할 수 있겠죠?
이렇게 또 하나 깨닫는 하루입니다.
감사합니다. 조레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