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특색있는 회화 작업들을, 기세있게 쏟아내는 박경률의 퍼포먼스를 지켜보는 일은 그만큼이나 신이 난다. 그가 꼭 박경률이어서가 아니라, 그로부터 비슷한 세대의 페인팅 작가들이 품어왔을 고민과 내파, 복구와 재건에 이르는 과정 속의 실험과 성장의 징후들을 투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 백아트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 <On Evenness>는 최근 몇 년 간 부단한 실험을 통해 스스로가 견인해 온 도약의 지점에 와 있는 프레젠테이션이다.
미술계에서 반복되어 온, '회화의 회화성'을 둘러싼 재귀적 담론이나 세대론의 프레임에 자기작업의 특수성을 녹여내는 일에 큰 흥미가 없어 보이는 작가에게 스스로의 작업 논리와 창작 리듬은 어떤 것이 선재先在하기 보다는 서로 밀고-끌며 회화적 실험의 모멘텀을 만들어 가는 힘이다.
세 개의 층을 따라 분할된 공간에서 마흔 점 이상의 회화와 조각, 세라믹, 오브제들이 여러 집합과 분산을 이루어 내는 전시의 솔루션은 “회화로부터 확장된 복합 설치”의 방식으로 요약 서술될 수 있다. 그러나 회화 개념과 실천의 측면에서 여러 키워드를 관통하는 이번 전시는 퍽 기이한, 경우에 따라서 난해한 풍경이다.
전시는 작년 송은아트스페이스에서 선보였던 “조각적 회화 설치”의 디스플레이 전략과 특유의 색채 사용에서 비롯된 무드를 잇고 있지만 현장에서 체감하기에 이전보다 훨씬 정치하게 설계된 우연과 무연의 질서가 있다.
건축의 수직적 입면과 층을 달리하며 조금씩 바뀌는 평면적 조건에 반응하며 걸리고 놓인, 때에 따라 깔리거나 매달려있기도 한 작품들은 카메라 앵글과 관람객의 망막 상에서 높이와 크기, 중첩된 면적과 각도를 매번 달리 제공한다.
이러한 전시의 미장센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작품을 단독적 대상으로써 감상하는 것을 훼방한다. 그리고 전시에서 무엇인가를 보았다는 미적 충족감을 쉽게 내주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전시장에 머무르는 시간을 지연시키며, 자꾸만 지나온 자리를 되살피게 하는 것은 작품의 열린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화면을 구성하는 정형과 비정형, 추상과 구상, 실재와 상상의 파편들 간의 기묘한 어긋남/어울림은 이내 화면 외부로 확장되어 전시장 안팎에서 일종의 프랙탈 구조를 이룬다. 다종의 것들이 특히 더욱 조밀하게 몰려있는 2층 공간에 이르러, 관람객의 아이-트래킹(eye tracking)과 대뇌 피질 활동은 최대치로 분주해진다.
만일 작품의 제목까지도 눈여겨보는 관람객이라면, 어딘가 시니컬한 유머가 깃든 제목 정보까지, 전시는 압축되고 승화된 결정체이기보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들을 자꾸만 불러내는 미완태에 가깝다.
박경률의 최근 회화들은 이미 화면 안에서부터 전경과 후경, 중심과 주변, 손이 알아서 재빨리 그어낸 선과 머리로 구상하고 정성을 다해 채운 면적, 추상과 구상 등 위계와 선후를 정할 수 없는 비 결정적 내러티브 구조를 지향한다.
회화-설치의 원 재료들이 1차 제작된 스튜디오를 떠나 주어진 공간에서의 ‘설치’ 과정을 거치면서 작업의 재료들은 새로운 관람 구조로 재편된다. 그 속에서 끌리는 파편들을 골라내고, 더 큰 덩어리로 이어내어 일종의 집합을 완성하고, 최후의 심상과 서사를 종합해 내는 일은 결국 관람객의 몫이 된다.
평평하고, 균일한 특질의 회화 전시를 기대하며 온 이들에게는 어쩐지 ‘Even’해 보이지 않는 이번 전시에서 작가가 숙고했던 “Evenness”는 어떤 의미였을까. 번역하기에 따라 균질, 균일, 균등의 단어로 이해되기도 하는 “Evenness”는 지난 여름 런던의 Lungley 갤러리에서 선보였던 동명의 전시에서 다루어진 적이 있다.
작가는 화면 속의 붓질 하나하나, 재현되거나 추상된 이미지, 공간 속의 오브제, 공간을 이루는 자연적/인공적 요소들 마저 모두 작품의 총체적 이미지와 내러티브를 촉발시키는 개별적이고 “동등한” 회화적 조건으로 규정하고 있다. 울퉁불퉁한 조건들을 동등한 요소들로 받아들일 때, 회화를 작동시키는 관습적 적용과 창작술을 허물어 버리는 역설이 발생하게 되는 셈이다.
회화를 회화로, 작업을 작업으로, 나아가 전시를 전시로 소비하게 만드는 것이 기실 엄청난 우연과 무연이 개입된 복잡한 조건들이며, 그럼에도 그토록 익숙한 예술 생산과 수용의 토대를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작가도, 우리도 알고 있다.
다만, 자기 작업의 역사와 당위를 다른 각도에서 되묻고, 변화된 실천을 해나가는 박경률의 고민과 궁리로부터 어떤 전망을 해볼법한 단서들을 추려본다.
작가들이 전통적인 이미지 메이커로서 붙들려 있는 역할 수행과 전시방법으로부터 새로운 방식을 모색해 나가는 시도들을 주시하며,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의 작품과 전시의 룰 메이커가 되고, 이미지 소스를 다루는 공간 속의 DJ 혹은 사이퍼cypher가 되는지, 이윽고 변화하는 시대에 대응하는 시각적 저자로 이행해 나가게 될지 미루어 그려보게 된다.